심판의 시간이 오고 있다. 헌법 1조 2항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규정한다. 4월 10일 22대 국회의원 총선거는 주권자인 국민이 권력을 행사하는 날이다.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은 국민의 권력이 좀 더 원활하게 행사되도록 4월 5일과 6일 이틀간 사전투표도 실시한다. 마침 행정부는 여당인 국민의힘이 차지했고 입법부는 거대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 쥐고 있다. 22대 총선이 ‘심판의 날’인 것을 피할 수 없는 구도다.
입법 권력을 4년간 위임할 민심의 위력 앞에 한동안 보이지 않던 풍경이 재연되고 있다. 비 오는 날 현직 국회의원들이 한 표를 호소하며 맨바닥에서 큰절을 하는가 하면 무릎을 꿇는 일은 다반사다. 삭발을 하고 함거에 들어가 측은지심도 유발한다. 선거가 좀 더 자주 있어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정권 심판의 뭇매를 피하기 위해 여당은 민심을 존중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이종섭 주호주 대사가 전격 사퇴한 후 유세 현장에서 “국민 여러분이 지적할 때마다 그때 그때 힘들어도 비판받아도 반성하고 반응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윤석열 대통령의 인사 스타일로 볼 때 “이대로 가면 죽는다”는 여당의 읍소가 없었다면 임명한 지 25일 된 대사를 물러나게 했을 것 같지 않다. 한 위원장은 “우리는 정말 처절하게 바뀌고 있다”며 “딱 한 번만 더 믿어달라”고 했다.
거야 심판론이 ‘시들하다’고 본 민주당은 입단속을 하고 “머리 들면 죽는다”고 경계하면서도 “승기를 잡았다”고 자평한다. 개헌을 할 수 있는 200석 이상의 압승을 내심 기대하는 분위기가 없지 않다. ‘친명횡재·비명횡사’ 공천을 밀어붙였던 이재명 대표가 민주당 후보들의 잇따른 부동산 투기 의혹이 터져나와도 이를 무시하고 오만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선거에서 정권 심판론이 더 크게 작동할 것으로 굳게 믿기 때문이다. 과연 그럴까.
조국혁신당의 돌풍은 조국 대표의 인기가 아니다. ‘심판의 프레임’에서 벗어나 어부지리를 한 것이 원동력이다. 영부인의 명품 가방 수수 의혹에 끝까지 사과하지 않고, 피의자를 느닷없이 대사로 임명해 해외로 내보내는 대통령에게 어이없어하던 국민이 1당 대표의 거침없는 사당화를 목격하고 갈 곳 몰라 하다 조국혁신당으로 대이동을 한 것이다.
한 위원장은 연일 조 대표를 향해 2심까지 징역 2년의 실형이 선고된 ‘범죄자’라고 역설하지만 ‘조국 심판론’에 불이 붙을 기미는 없다. 오히려 지역구에서 민주당 후보를 찍고 비례대표는 조국혁신당을 찍는 ‘지민비조’를 넘어 ‘지국비조’를 국민의힘이 걱정해야 할 상황이다.
선거철에 면종복배(面從腹背)가 넘쳐나지만 국민은 다 기억하고 있다. 김건희 여사가 새해 들어 공식 석상에서 완전히 모습을 감췄다고 해서 각종 인사 개입 논란과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 연루 의혹, 명품 가방 수수 문제를 유권자가 잊지는 않는다. 대통령실은 왜 잘한 것은 기억해주지 않느냐고 억울해한다. 그러나 국민은 그 또한 모르지 않는다. 야당이 국회에서 발목 잡기에 매진할 때 정부가 미래를 위해 사교육 카르텔 혁파에 나서고, 거대 노동조합의 회계 투명화에 힘 쏟고, 손해를 감수하며 의료 개혁에 매진하고 있음을.
그래서 민주당이 “부동산 투기가 망국병”이라고 해놓고 투기꾼보다 더한 편법을 동원한 자당 후보를 감싸고만 돈다면 총선 승리는 결코 ‘떼놓은 당상’이 아니다. 거야 심판론을 가볍게 여기고 인천 계양을이 텃밭이라고 해서 이 대표가 과연 당선을 장담할 수 있을까. 국민은 정권 심판론에 기대어 경제 챙기기에 무심한 야당을 결코 가볍게 보고 있지 않다.
민심은 하늘이고 하늘은 변덕스럽다. 선거가 고작 9일 남았다고 천변만화(千變萬化)하는 민심이 ‘내 편’이라고 자만하는 후보나 정당은 주인의 선택을 받기 어렵다. 국민은 권력 행사의 마지막 순간까지 누가 진실로 민심에 더 응답하고 있는지 평가할 것이다. 주권자의 권력 앞에 겸손해야 할 시간이다. 무엇보다 선거가 끝났다고 국민이 잠시 위임한 권력을 제 것인 양 착각하는 국회의원 당선인은 없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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