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팝 역사 최대 사건 중 하나는 싸이의 빌보드 진출이다. 현란한 군무와 대한민국 대표 셀럽들의 개인기에 코믹함까지 곁들여진 ‘강남스타일’ 뮤직비디오의 위력이 순식간에 전 세계를 강타했다. K팝 아이돌 ‘언타이틀’ 출신 프로듀서 유건형의 귀에 착 감기는 후크(hook) 멜로디는 ‘강남스타일’을 ‘월드스타일’로 끌어올렸다.
강남스타일이 빌보드 ‘핫100’ 차트 1위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 같았다. 할리우드 톱스타 모셔가듯 미국 메이저 방송사들이 싸이를 잇따라 토크쇼에 초청했다. 싸이는 배꼽을 쥐게 만드는 조크를 선사하며 미국 안방을 흔들었다. 하지만 세기의 밴드 ‘마룬5’의 걸작 ‘원 모어 나이트’에 발목이 잡혔다. 2012년 9월 이후 7주 동안 빌보드 핫100 2위 자리에서 ‘넘버1’을 노렸지만 핫100 왕좌의 문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강남스타일은 비운의 빌보드 핫100 넘버2 곡으로 퇴장했지만 마룬5와 월드 넘버1 타이틀을 겨룰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K팝 팬들은 엄청난 자부심을 얻었다. 싸이의 아쉬운 고배 이후 K팝 아티스트가 빌보드 핫100에서 넘버1 타이틀을 거머쥐기까지는 8년의 시간이 걸렸다. 코로나19의 위세가 한창이던 2020년 8월 방탄소년단(BTS)이 공개한 ‘다이너마이트’가 빌보드 핫100 1위 자리에 오르자 전 세계 K팝 팬들은 환호했다. BTS는 ‘다이너마이트’ 외에도 ‘라이프 고즈 온’ ‘버터’ ‘퍼미션 투 댄스’ 등으로 핫100 1위를 여러 차례 차지했고 걸그룹 ‘블랙핑크’와 ‘뉴진스’에 이어 ‘트와이스’도 종합 앨범 차트인 ‘빌보드 200’의 1위를 꿰찼다.
한국 K팝 그룹의 승승장구는 영원할 듯 보였지만 K팝 내부에서는 지난해부터 우려의 목소리와 위기 신호가 연이어 터져 나오고 있다. 올해 2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그래미 시상식만 해도 예년과는 다른 확연한 온도차가 느껴진다. BTS는 지난해까지는 3년 연속 후보에 올랐지만 올해는 한 곡도 노미네이트되지 못했다. BTS 멤버 지민이 ‘라이크 크레이지’로 지난해 핫100 차트 1위에 오르고 정국이 ‘세븐’으로 돌풍을 일으키면서 역시 핫100 정상 자리를 차지했지만 그래미상 후보로 지명되지 못했다.
올해 그래미 수상 부문 94개 중 단 한 분야에도 K팝 가수가 노미네이트되지 못하자 ‘K팝 패싱’ 아니냐는 의혹의 시선도 나오지만 K팝 시장의 내부 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올 것이 왔다는 그런 분위기다. 최악의 위기는 아니지만 적어도 심상치 않은 징조들이 K팝 시장 안팎에서 고개를 들고 있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BTS 멤버들의 군 입대로 인한 공백과 소속사를 변경한 블랙핑크의 콘서트 축소 가능성, 중국 K팝 팬덤의 앨범 구매량 감소 등을 우려 요인으로 지목한다. K팝 내부에서는 아티스트들의 활동을 억누르는 유무형의 장애를 더 큰 걸림돌로 지적한다. 그 가운데는 난립한 K팝 시상식도 있다.
최근 몇 년 새 우후죽순 늘어나 한 해 20여 개에 이른 K팝 시상식이 권위는커녕 K팝 아티스트의 역량을 소진시키는 기생적인 행사로 전락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크다. 수상을 명분 삼아 아티스트의 참가를 압박하는데 정작 출연료도 제대로 주지 않는다는 게 공공연한 비밀이다. 티켓 값을 올려받기 위해 동남아 지역에서 시상식을 개최하는 경우가 많은데 한국 시상식이 1만~2만 원인데 비해 해외 시상식 티켓 값은 50만 원을 넘는다. 최근 시상식에서는 출연 가수가 무대에서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미비한 공연 시설에 아티스트들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생애 최악의 음향 시스템이었다”는 성토의 글까지 올렸다. 급기야 지난달 말 한국음악콘텐츠협회는 ‘무분별하게 개최되는 K팝 시상식을 반대한다’는 공식 성명까지 내놓았다.
국내 최대 K팝 기획사들마저도 혀를 내두르는 K팝 시상식의 횡포는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될 지경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글로벌 스탠더드는커녕 기본기조차 갖추지 못한 채 수익 챙기기에만 골몰하는 K팝 시상식을 향한 원성의 목소리가 커질수록 K팝 위기의 골은 더 깊어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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