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인 1945년 7월, 영국에서 10년 만의 총선거가 치러졌다. 전시 보수당 내각을 이끌어온 ‘국민 영웅’ 윈스턴 처칠 총리가 80% 이상의 지지율을 기록하던 시기다. 하지만 처칠의 인기에 기대 승리를 노리던 보수당은 이 선거에서 최악의 참패를 맛봤다. 평화의 시기가 다가오자 내치와 개혁을 원하게 된 민심이 ‘요람에서 무덤까지’로 상징되는 복지국가 비전을 제시한 노동당으로 쏠린 것이다. 보수당 의석 수는 432석에서 197석으로 쪼그라들었다.
존립 위기를 느낀 보수당은 뼈를 깎는 자성과 개혁에 돌입했다. 당내 개혁파 리처드 A 버틀러의 주도로 완전 고용 및 복지국가 개념을 수용하는 ‘산업 헌장’을 채택하고 능력 있는 정치 신인 등용을 위해 당 구조를 개편했다. 6년 뒤인 1951년, 보수당은 선거에서 321석을 얻어 정권 탈환에 성공하고 1964년까지 장기간 정권을 유지했다.
4월 10일 22대 총선을 며칠 앞두고 지난 세기 영국 보수당의 위기 극복 스토리가 불현듯 떠올랐다. 6년 만에 부활한 영국 보수당과 달리 몇 년째 ‘보수 위기론’의 늪에 빠진 대한민국 보수 정당의 답답한 현실 때문이다. 2020년 4월 총선 때 상황은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에 그리 유리하지만은 않았다. ‘조국 사태’에 대한 국민 피로감이 극심했고 문재인 정부의 ‘소득 주도 성장’이 민낯을 드러내며 민생은 팍팍해졌다.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을 계기로 붕괴됐던 보수가 회생할 기회였다. 하지만 국민의힘의 전신인 미래통합당은 공천 논란과 잇단 실언, 정체성을 잃은 정책 혼선 등을 꽉꽉 눌러 담은 ‘후진 정치 종합 선물 세트’로 유권자들의 외면을 자초했다. 그 결과는 보수 역사상 최소 의석수라는 충격적 패배와 거대 야당에 휘둘려 ‘역대 최악’으로 남은 21대 국회였다.
선거에 진 미래통합당이 “인내를 갖고 우리 당에 시간을 달라”고 호소한 지 4년이 지났다. 그런데 다시 선택의 시간 앞에 선 보수 정당인 국민의힘은 ‘위기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야권의 도덕성 논란에 손쉬운 승리를 낙관한 탓일까. 거대 야당에 발목 잡혀 뭘 해보기도 어려웠겠지만 국민 눈높이에 맞지 않는 구태 공천과 분열이 반복됐고 소통과 설득 없는 권력의 오만함이 엿보였다. 최근 서울경제신문 여론조사에서 국민의힘 지지율은 한 달 새 6%포인트나 급락했다. 열세 속에 선거가 임박하자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입에서 “쓰레기” “개 같은 정치” 같은 험한 말이 쏟아졌다. 또 무상 보육, 등록금 면제, 부가가치세 인하 등 선심성 공약들이 튀어나오고 있다.
보수 정당이 바로 서지 못하니 진보 세력은 아예 정상 궤도를 벗어나버렸다. 21대 국회를 이재명 대표의 ‘방탄’과 입법 폭주로 얼룩진 정쟁판으로 만든 더불어민주당은 온갖 도덕적 흠결과 무리수에도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는지 상식 밖의 행태로 총선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있다. ‘비명횡사 친명횡재’라는 사적 공천으로 대중 앞에 선 후보들은 입에 담기 부끄러운 막말과 근거 없는 음모론, 왜곡된 역사·안보 인식을 여과 없이 퍼뜨리고 있다. 이러니 거대 양당에 대한 불신과 냉소가 확산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런데 기성 정당에 대한 중도층의 혐오는 엉뚱하게도 조국혁신당 돌풍이라는 기현상을 낳고 있다. 2심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 받은 당 대표가 온갖 법적·도덕적 흠결을 지닌 인사들을 비례대표 후보로 영입하고 노골적인 정치 보복을 선언했다. 이쯤 되면 22대 총선은 ‘상식 부재’ 선거로 부를 만하다.
그 책임의 적지 않은 부분은 보수를 바로 세우지 못한 윤석열 대통령과 국민의힘에 있을 것이다. 한 위원장은 정치 쇄신을 약속하며 “딱 한 번만 더 믿어달라”고 한다. 반복되는 호소에 과연 민심이 응답할까. 정가에서는 민주당·조국혁신당 등 범야권이 200석을 차지할 것이라는 얘기까지 흘러나온다. 물론 선거 결과는 뚜껑을 열어봐야 안다. 하지만 승패와 상관 없이 보수 정치는 4년 전보다 무거워진 책임과 개혁의 과제를 안게 됐다. 근대 보수주의 창시자로 알려진 에드먼드 버크는 “변화의 수단을 갖지 않는 국가는 보존의 수단도 없다”고 했다. 한국 정치의 정상화를 위해서는 보수가 먼저 변해야 한다. ‘보수 위기론’은 이번이 마지막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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