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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물감 다 쓰고 나면, 내 인생도 닳아 없어지겠죠

■'땡땡이 화가' 김용익 개인전

물감 소진 프로젝트 첫 공개

"재료 더 사지않겠다" 파격 선언

철저한 계획으로 낭비없이 사용

"삶 집착 버리면 죽음에게서 자유"

77세 노화백의 '인생철학' 담아

김용익 작가.사진=서지혜 기자




“살아있는 동안 가진 물감을 다 쓰고 죽겠습니다.”

부산 망미동 국제갤러리에서 한 70대 화가가 최근 파격적인 선언을 했다. 발언의 주인공은 ‘땡땡이 화가’로 불리는 77세 화백 김용익. 그는 “내 인생을 소진하는 것과 동일한 차원으로 생각하며 작업하고 있다”며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한 일종의 제의적 행위”라고 설명했다.

국제갤러리는 부산점에서 김용익 작가의 ‘물감 소진 프로젝트’ 연작을 처음으로 공개하는 전시 ‘아련하고 희미한 유토피아’를 진행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작가의 2016년부터 최근까지의 근작 60여 점(부산점 19점, 서울 한옥 40여 점)을 볼 수 있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시종일관 삶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자유로워지는 것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드러냈다. 작가는 2018년 12월 31일부터 ‘물감 소진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물감이나 색연필 등을 더 이상 사지 않고 소유하고 있는 모든 그리는 데 사용되는 회구(繪具)를 여생에 걸쳐 소진하는 프로젝트다. 파격적이고 극단적으로 보이지만 사실 계획적이고 전략적이다.

김용익 '절망의 미완수 22-1', 2016-2022, 194 x 259 cm. 사진 제공=국제갤러리


작가는 남은 회구를 색깔별로 골고루 쓰기 위해 화폭을 잘게 나누어 작업한다. 물감을 함부로 쓰고 비관적으로 죽음의 시일을 앞당기겠다는 게 아니다. 작가는 미술재료를 최대한 오래 사용하고자 철저하게 계획을 세워 아껴 사용한다. 그래서 물감의 두께가 얇거나 흐릿하고 질감도 거칠다. 연필로 그린 밑그림이 그대로 물감 위로 보이는 점도 다른 작가들의 작품과 다른 특징이다.

벽에 걸려 있어야 할 그림을 갤러리 중앙에 세워 놓은 작품도 이색적이다. 작품의 제목은 ‘땡땡이 화가의 변신은 무죄(2023)’. 물방울의 이미지를 반전시켜 그린 두 캔버스를 연결한 후 비닐을 씌워 마치 설치 작품처럼 보이게 했다.



김용익, ‘물감 소진 프로젝트 24-2: 망막적 회화로 위장한 개념적 회화, 2024’. 사진제공= 국제갤러리


그렇다고 계속 한 가지 형식만 고수하는 것도 아니다. 초기 프로젝트는 균일한 간격으로 칸을 나누는 방식으로 진행 됐지만 점차 원과 삼각형 등 도형을 넣는 등 변화를 주기 시작했다. 그 결과 완성된 작품은 알록달록한 색의 기하학적 추상 작품이 됐다.

물감 소진 프로젝트 연작에 그려진 도형들은 우주 변화에 대한 작가의 관심이 투영됐다. 작품마다 아홉 개 원이 등장하는데 하늘이 9겹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중국의 옛 우주론 개념에서 가져왔다는 설명이다.

일부 작품에서는 마치 일기처럼 작가로서의 고뇌가 담긴 끼적임도 볼 수 있다. 예컨대 기존에 완성한 작업을 검정이나 흰색 물감으로 일부만 덮어버린 작업에는 ‘절망의 미완수’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작가는 1990년대에 자신의 작품을 검은색 물감으로 뒤덮고 ‘절망의 완수’라는 제목을 지은 바 있는데, 이번에는 완전히 덮지 못했다는 의미로 ‘미완수’라는 글을 쓴 것. 또 ‘나는 미술을 절망할 수 없어’라는 글귀가 적힌 작품에서는 예술을 지속하고 싶은 작가의 열망을 엿볼 수 있다. 작가는 "당시 나는 과연 내가 미술을 할 필요가 있는가, 이제 사회에서 내 미술이 정말 필요한 것인가 생각하면서 절망감 같은 걸 느꼈지만 결국 미술에 대해 절망할 수가 없었고 그래서 지금도 이렇게 전시하고 있다"며 작품을 설명했다.

남은 생의 시간과 그가 남겨둔 물감이 같은 속도로 소진 될지는 누구나 알 수 없다. 수학 공식처럼 딱 떨어지길 바라고 시작한 작업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작가는 개의치 않고 묵묵히 삶을 성실하게 걸어나가는 방법을 물감 속에서 찾고 있다. 전시는 4월 21일까지. 서울의 국제갤러리 한옥공간에서도 같은 기간 진행된다.

김용익의 ‘포장되고 지워진 유토피아’ 연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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