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에서 25년 만에 최대 규모의 강진이 발생한 가운데 글로벌 반도체 업계가 사태 추이에 바짝 긴장하는 모습이다.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업체인 TSMC가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인 만큼 정상 가동 여부에 따라 반도체 시장에 미칠 영향이 큰 탓이다. 특히 이번 지진을 계기로 대만에 집중된 반도체 산업 구조를 바꾸는, 이른바 ‘탈(脫)대만’ 움직임이 가속화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4일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TSMC는 3일 오전 발생한 화롄 지진과 관련해 공장 설비의 80%를 복구했다고 밝혔다. 대만 2위 파운드리 업체인 유나이티드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UMC) 역시 정상 운영을 재개했다. 대만을 강타한 강진의 여파로 주요 반도체 공장들이 멈출 수 있다는 관측이 나왔지만 업체들은 정상 복구를 강조하고 나선 것이다. TSMC는 “모든 극자외선(EUV) 장비들을 포함해 주요 장비에는 피해가 없다”며 “일부 소수 장비가 손상됐지만 완전 복구를 위해 가용 자원을 총동원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해당 업체들의 신속한 대응과 정상 가동 주장에도 시장의 불안감은 가라앉지 않는 분위기다. 반도체 생산 자체가 정밀한 공정이 요구되는 만큼 작은 충격에도 차질이 빚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로이터통신은 “대만 지진은 글로벌 공급망에도 압박을 가했다”면서 “TSMC 공장은 대부분 진원지에서 반대편 해안에 있지만 글로벌 기업을 위한 칩을 생산하는 데 중요한 취약 장비로 가득 차 있다”고 지적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도 “반도체 제조에 사용되는 실리콘 웨이퍼는 정밀한 취급과 통제된 환경이 필요하다”면서 “사소한 결함으로도 폐기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잠시 가동을 중단해도 생산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재가동하는 데 필요한 시간과 작업으로 수천만 달러의 비용이 소요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번 지진이 반도체 가격 상승을 압박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일부 반도체 기업들은 반사이익을 누릴 수 있지만 핵심 부품인 반도체를 확보해야 하는 주요 기업들은 추가 비용이 커질 수밖에 없다. 반도체 투자은행(IB) 바클레이스는 “정교한 반도체 생산 시설은 몇 주간 진공 상태에서 연중무휴로 24시간 가동해야 한다”면서 “일부 가동 중단은 생산 중인 첨단 반도체가 손상될 수 있음을 의미하며 결국 공정 차질은 반도체 가격 상승 압력을 높일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런 가운데 글로벌 반도체 산업이 대만에 과도하게 쏠린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스태티스타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 기준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에서 TSMC를 포함한 대만 기업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68.6%에 이른다. 특히 TSMC의 경우 스마트폰과 AI와 관련 기기에 필요한 7㎚(나노미터·10억분의 1m) 이하 최첨단 반도체 점유율은 90%가 넘는다. 생성형 AI 개발에 필수적인 엔비디아의 그래픽처리장치(GPU) 역시 TSMC에서 생산되고 있으며 퀄컴과 애플도 고객사로 두고 있다. 워싱턴포스트(WP)는 “TSMC의 칩 생산은 매우 정확하게 진행되기 때문에 짧은 시간 가동을 중단해도 수백만 달러의 비용이 발생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불의 고리’로 불리는 환태평양지진대에 위치한 대만에서 또다시 강진이 발생할 경우 글로벌 공급망 전체가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여기에다 중국과의 군사적 긴장감이 높아지는 등 지정학적 리스크까지 더해지면서 대만 쏠림에 대한 우려는 더욱 커지고 있다. 독일의 싱크탱크 SNV의 기술·지정학적 프로젝트 담당 얀페터 클라인한스 이사는 대만을 반도체 산업에서 “실패를 불러올 가능성이 높은 가장 핵심적인 단일 지점”이라고 지적했고 CFRA리서치의 애널리스트 앤젤로 지노도 “이번 지진은 한 지역에서 너무 많은 파운드리 산업이 있는 것에 대한 위험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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