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10일(현지 시간) 열린 미일정상회담에서 양국간 동맹을 군사·안보 적으로 ‘보호하는 동맹’에서 글로벌 질서를 함께 수호하는 ‘행동하는 동맹’으로 업그레이드 하기로 했다. 양국 안보 협력이 대폭 강화되고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일본의 ‘대(對)중국·북한 견제 역할’이 커지면서 일본이 앞으로 ‘보통국가화’, 즉 전쟁 가능한 나라로의 전환에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게 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워싱턴DC 백악관에 도착한 기시다 총리를 환영하면서 “일본과 미국의 깨지지 않는 동맹은 인도태평양과 전 세계의 평화, 안보, 번영의 초석”이라며 “양국은 더 강력한 국방 파트너십을 구축하고 있다”고 말했다. 기시다 총리는 “일본은 미국의 친구들과 손을 잡고 인도·태평양과 세계의 과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미일 관계를 끊임없이 발전시켜 나갈 것”이라고 화답했다. 그는 일본이 미국의 건국 250주년(2026년)을 기념해 벚나무 250그루를 새로 보내는 것을 거론하며 “벚꽃 같은 미일 동맹의 유대는 계속 자라고 강해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번 미일 정상회담은 전 세계에서 일본의 안보적 역할을 확대하고, 양국이 글로벌 질서를 공동으로 수호하는 파트너가 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안보 자원 고갈에 시달리는 미국이, 자국의 공백을 맡길 파트너로 일본을 택한 것이다. 바이든 행정부 고위 당국자들은 “전 세계에서 미국이 하는 일 중 일본이 지원하지 않는 일은 거의 없다”며 일본의 역할 확대에 반색을 표했다.
미일 양국은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무기 공동 개발 및 생산을 논의하는 ‘방위산업정책조정회의’(military industrial council) 출범을 발표했다. 국가 안보의 중추인 무기의 공동 개발 및 생산을 위한 협의체를 신설하게 됨에 따라 미국은 제조업 강국 일본을 미국의 ‘방위 산업’ 기지로 구축하는 효과를 노리고 있다. 일본 역시 평화헌법 체제 하에서의 암묵적인 족쇄에서 벗어나 방위산업 생산 역량을 크게 높이고, 필요시 전쟁을 치를 수 있는 ‘보통국가’를 향해 나아갈 것으로 예상된다.
양국은 주일미군사령부의 지위를 격상하고, 유사 시 주일미군과 일본 자위대가 보다 신속하게 공동 대응할 수 있도록 일부 지휘권을 주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이는 미일 외교·국방장관급 ‘2+2 협의체’를 통해 구체화할 예정이다. 바이든 행정부에서 국가안보회의(NSC) 동아시아 국장을 지낸 크리스토퍼 존스턴은 “만약 중국이 대만을 공격한다면 미일이 이에 공동으로 대응해야 한다”며 “일본이 실질적인 작전 지휘권을 갖춘다면 실시간으로 군사작전을 조정할 수 있는 훨씬 나은 대응 능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외신들은 이번 회담이 바이든 정부가 추진해온 현대적인 군사 동맹을 구축하는 계기가 됐다고 보고 있다. 미국의 동맹 전략은 기존에 미국을 거점으로 다양한 양자동맹을 맺는 ‘거점 중심(Hub and Spoke)’에서 다양한 소다자 협의체가 협력하는'격자형(lattice-like)’ 구조로 전환하고 있다. 또 안보 협력의 범위는 역내에서 우주까지 확장하고 있다.
앞서 미국·영국·호주의 안보 동맹인 ‘오커스(AUKUS)’ 국방장관들은 8일 “우리는 일본의 강점, 그리고 일본과 오커스 3국 간에 긴밀한 양자 국방 협력 관계를 인식하며 일본과 오커스 ‘필러2’의 첨단 역량 프로젝트 협력을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영미권 국가들이 출범시킨 오커스가 인공지능(AI) 등 첨단 기술분야에서 일본과 협력하면서 외연 확장을 공식화한 것이다. 오커스는 첨단 군사기술을 공동 개발하는 협력체에 한국을 파트너로 포함하는 방안도 적극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요미우리신문은 극초음속활공체(HGV) 탐지를 위한 일본의 저궤도 위성망 구축에 미국이 협력하기로 했다고도 보도했다. HGV는 음속의 5배(마하 5) 이상 속도로 저공비행해 탐지와 요격이 쉽지 않은 미사일로 북한과 중국이 개발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번 정상회담에서는 일본의 도요타가 미 항공우주국(NASA)의 달 탐사선 제작에 참여한다는 발표가 나올 것으로 알려졌는데 일본 우주비행사가 비(非)미국인 중 최초로 달 탐사 임무에 참여한다는 내용이 포함될 것으로 전망된다.
미일정상회담에 이어 11일 열리는 미·일·필리핀 정상회의에서는 해상과 사이버 안보 분야 협력에 대한 새로운 이니셔티브(구상)도 선보일 것으로 전망된다. 워싱턴포스트(WP)는 “이번 정상회담은 아시아태평양 지역 동맹과 파트너십의 이른바 ‘격자형 안보 구조’를 강화하기 위한 바이든 행정부의 노력을 보여주는 최신 사례”라며 “이는 명백히 중국에 보내는 신호”라고 평가했다.
정상회담에 앞서 조 바이든 대통령은 전날 백악관을 방문한 기시다 총리를 극진히 예우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백악관 문 앞에 나와 기시다 총리를 맞이한 자리에서 악수를 나눴고 질 바이든 여사는 기시다 유코 여사를 포옹하며 친밀감을 나타냈다. 바이든 대통령 부부는 펜실베이니아주에서 회사를 운영하는 일본계 미국인이 손으로 만든 다리 3개짜리 탁자를 기시다 총리에게 선물했다. 탁자는 미국 토종 수목인 검은 호두나무로 만들었으며 공식 방문을 기념하는 명패가 포함됐다. 또한 미국 유명 가수 빌리 조엘이 사인한 석판화와 LP판 세트, 미국을 상징하는 가수들의 노래를 담은 빈티지 레코드판을 가죽 상자에 넣어 선물하며 극진히 예우했다. 질 여사는 유코 여사에게 미국 여자대표팀과 일본 여자대표팀의 사인이 담긴 축구공을 선물했다.
기시다 총리는 바이든 대통령과의 만남에 앞서 미국 기업인들과 만나 일본 투자를 촉구하는 등 실리 외교에 나섰다. 이 자리에는 IBM과 화이자·보잉·마이크론·웨스턴디지털 등 미국 기업들의 고위 경영진이 참석했다. 기시다 총리를 별도로 만난 브래드 스미스 마이크로소프트 부회장은 앞으로 2년간 29억 달러를 일본에 투자해 클라우드컴퓨팅과 AI 사업을 강화한다고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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