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과대학 증원을 두고 정부와 각을 세우던 의료계가 22대 총선 결과에 복잡한 속내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이 단독으로 과반 의석을 확보하며 의대 증원을 포함한 의료개혁 추진이 변곡점을 맞은 탓이다. 민심을 받아들여 무리한 의대 증원을 철회해야 한다는 목소리와 함께 공공의대, 지역의사제 등 한층 급진적인 정책이 속도를 내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11일 의료계에서는 제22대 국회의원 선거가 여당의 참패로 끝난 데 대해 "정부의 독단과 독선, 불통에 대한 국민의 심판"이라며 "의대 2000명 증원을 즉각 백지화해야 한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전국 40개 의대 교수협의회가 모인 단체인 전국의과대학교수협의회(전의교협)는 이날 성명을 통해 "준비되지 않은 무리한 증원은 의대 교육의 파행을 가져오고 궁극적으로 의료 시스템의 붕괴를 초래할 것"이라며 정부와 각 대학 본부를 향해 "국민의 뜻을 받아들여 의대 2000명 증원 절차를 즉각 멈추라"고 촉구했다.
전의교협은 전국 40개 의대 교수협의회가 모인 단체다. 전의교협 간부들은 지난달 24일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과 비공개 회동을 갖고, 공식석상에서 대통령과 전공의단체 대표의 만남을 호소하는 등 정부와 의료계 간 건설적 대화를 중재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써왔다.
의사들은 당정이 선거 참패에 대한 부담감으로 인해 의대 2000명 증원을 포함한 의료개혁의 속도를 늦추길 기대하는 분위기다. 서울의대 교수 비대위원장을 지낸 정진행 분당서울대병원 병리과 교수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4.10 총선 결과는) 헌정 질서를 무너뜨리고 개인 기본권을 침해한 걸 용서하지 않은 국민 심판”이라며 “윤 대통령은 정권 심판을 엄중히 받아들이고 졸속 추진, 거짓 의정협의를 즉각 파기하라”고 질타했다. 보건복지부와 교육부의 장·차관을 즉각 파면하고 전문가 중심의 보건의료개혁공론화위원회를 꾸려 의대 증원을 원점부터 재논의해야 한다는 요구도 내놨다.
의사단체는 정부가 '의대 2000명 증원'을 고집하자 이번 총선을 언급하며 '정권 심판론'을 꺼내 들었었다. 임현택 대한의사협회 차기 회장 당선인은 총선 전 “그동안처럼 여당을 일방 지지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의사에게 가장 모욕을 주고 칼을 들이댔던 정당에 궤멸 수준의 타격을 줄 수 있는 선거 캠페인을 진행하겠다. 의협 손에 국회 20∼30석 당락이 결정될 만한 전략을 가지고 있다”고 발언한 바 있다. 특히 이번 총선에서는 의사 출신 국회의원이 역대 최대인 8명이나 당선됐다. 표면적으로는 의료계가 정부와의 싸움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막상 의사들의 표정이 밝지만은 않다. 의사단체가 강경파를 중심으로 총선 전 여당에 대한 '심판'을 역설했던 것과는 사뭇 달라진 모습이다. 이를 두고 의료계 안팎에서는 보수 진영의 몰락이 오히려 의사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복잡한 셈법이 반영됐다고 해석한다.
정국의 칼자루를 쥐게 된 민주당이 필수 및 지역의료를 살린다는 명분 아래 문재인 정부 때부터 추진했던 ‘지역의사제’와 ‘공공의대’ 법안 통과에 총력을 기울일 것이란 관측도 힘을 얻고 있다. 실제 의대 증원은 진보정권의 대표적인 정책 아젠다다. 민주당은 문 정부 시절 '의대 400명 증원'과 함께 공공의대 신설 및 지역의사제 관련 법안을 내놨으나 의사단체의 반발과 코로나19 팬데믹이 맞물리며 계획을 접었다. 공공의대는 공공의료기관에서 일할 의사를 기르려고 국가가 운영하는 대학이다. 문 정부는 공공의대 졸업자가 10년간 공공병원에서 의무 복무하는 방안을 제시했었다. 지역의사제는 비수도권 의대생 일부를 ‘지역의사 전형’으로 선발하고, 졸업 이후 일정 기간 지역 병원에서 의무적으로 일하게 하는 제도다. 둘 다 의무 복무를 조건으로 국가가 장학금을 지원한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총선이 끝나는대로 ‘보건의료개혁을 위한 공론화 특별위원회’(가칭)를 구성해 의료공백과 혼란을 종식시키고 시민, 환자들까지 참여한 가운데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내겠다고 예고한 바 있다.
의사들 입장에서는 의대 증원 규모를 줄인다는 보장 없이 자칫 공공의대, 지역의사제 등 과거 민주당이 밀어붙였던 법안에 발목이 묶일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려워진 셈이다. 앞서 더불어민주당 공공·필수·지역의료 태스크포스(TF)는 올 1월 25일 국회에서 시민단체들과 함께 간담회를 열고 21대 국회가 종료되기 전에 지역의사제와 공공의대법을 반드시 통과시키겠다는 의지를 거듭 밝혔다.
이번 총선을 통해 국회 입성을 확정한 의사 출신 국회의원 8명 중 의대 증원을 전면 반대해 온 후보는 개혁신당 비례 1번인 이주영 당선인(전 순천향대 천안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이 유일하다. 이 당선인 역시 "지금 시점에서는 의대 증원에 찬성할 수 없다. 다른 필수의료 대책이 선행되고, 필요한 의사 인력의 규모는 과학적으로 추계해서 결정해야 한다”고 밝히며 증원 규모 합의에 관한 여지를 남겼다.
의대 증원을 찬성하는 의료계 대표인사로 △건강보험 100% 비급여 없는 병원 도입 △비급여 진료비 청구 의무제 도입 △실손보험 3자 계약 제도 추진 등 강도높은 의료개혁 공약을 제시했던 김윤 더불어민주연합 비례대표(서울의대 예방의학교실 교수)가 당선을 확정 지은 것도 변수로 평가된다.
일각에서는 정부가 전공의 면허정지 등 그간 미뤄뒀던 행정처분에 나설 것이란 관측도 제기된다. 현 정부에 대한 부정적 평가와 관계없이 의대 증원을 찬성하는 여론이 여전히 압도적인 데다 정책의 일관성 측면에서 강성 기조를 이어갈 것이란 견해다. 사직 전공의 중의 한 명인 류옥하다 씨(가톨릭중앙의료원 사직 인턴 비대위원장)는 “이제껏 정부가 보여준 불통, 거짓말, 사분오열된 모습으로 미뤄 짐작한다면 총선 이후 더욱 국민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의대 정원 정책을 더 강하게 밀어붙일 가능성이 없지 않다고 여겨진다”고 주장했다. 이날 서울행정법원 행정5부(부장판사 김순열)이 정부로부터 의사면허 정지 3개월 처분을 받은 김택우 의협 비대위원장(강원도의사회장)이 보건복지부 장관을 상대로 "의사면허 자격정지 처분을 취소해달라"고 낸 집행정지 신청을 기각하면서 이 같은 관측에 힘이 실렸다. 문제는 이러한 전개가 이어질 경우 의료대란의 키를 쥐고 있는 전공의들을 설득해 병원으로 돌아오게 만들 가능성이 더욱 요원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의사출신으로 4선에 성공한 안철수 국민의힘 의원이 중재 역할을 담당하길 기대하는 분위기도 읽힌다. 안 의원은 이날 SNS를 통해 "총선에서 보여주신 민심의 준엄한 심판에 책임 있는 여당의 중진 의원으로서 국민 뜻을 겸허히 받들겠다"며 "의대 증원을 1년 유예하고 단계적 증원 방침을 정해 국민들의 분노에 화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의사들은 조속히 환자 곁으로 돌아오고 정부는 증원의 전제 조건으로 필수 의료인력 및 의사 과학자 확보 방안, 지방 의료 발전을 위한 법률, 의료수가 조정, 투자 계획을 내놔야 한다는 게 그의 요구다. 특히 "의대 증원 정책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인 책임자들의 경질이 불가피하다"고 발언해 보건복지부와 교육부 장·차관 경질을 요구하는 의료계의 기대에 부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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