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의 첫 번째 영화는 무엇인가요? 저의 생애 첫 영화는 ‘로미오와 줄리엣’입니다. 그땐 너무 어려서 그 섬세한 감정까지 다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글로만 접한 로미오와 줄리엣의 절규를 실사로 보니 무척 황홀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후 몇 번이나 보고 또 보던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을 그만 보게 된 건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사생활을 알게 되면서부터였어요. (저와 아무 상관 없는 일이었지만) 아무튼 어항 건너편의 줄리엣(클레어 데인즈)을 바라보며 사랑에 빠져버린 그 로미오와 지금의 로미오가 너무 달라 작품에 몰입이 잘 되지 않았어요.
한참 후 저는 뮤지컬로 두 번째 로미오와 줄리엣을 만났습니다. 배우는 김소현, 신성록. 처음에는 살짝 어색했어요. 그럴 수 있죠. 영화와 뮤지컬은 형식이 다르고, 또 미국인 배우들이 아닌 한국인 배우들이 연기하는 이탈리아 사람들의 이야기가 와닿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역시 적응의 문제겠죠. 김소현이 주연인 오페라의 유령이 어색하지 않듯, 이제 우리나라 사람 누구도 한국 배우가 해외 원작의 작품을 연기한다고 해서 어색해 하지는 않습니다. ‘원작을 훼손한다’며 비난하는 일은 더욱 없고요.
흑인 줄리엣은 참을 수 없어!
영국 웨스트엔드에서 연극으로 제작 중인 ‘로미오와 줄리엣’이 세계를 뜨겁게 달구고 있습니다. 논란의 내용은 ‘인어공주’ 때와 같습니다. ‘흑인 줄리엣을 캐스팅해 원작을 훼손했다’는 겁니다.
제작사 제이미 로이드 컴퍼니가 발표한 전체 캐스팅을 보면 마블 ‘스파이더맨’ 시리즈로 유명한 배우 톰 홀랜드가 남자 주인공인 로미오 역을, 배우 프란체스카 아메우다 리버스가 여자 주인공인 줄리엣 역을 맡았습니다. 리버스는 톰 홀랜드만큼 우리에게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BBC 코미디 시리즈 ‘배드 에듀케이션’ 등에 출연한 배우입니다.
그런데 캐스팅이 공개되자마자 제작사의 SNS는 들끓기 시작했어요. 줄리엣 역을 맡은 배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는데요. 제가 본 댓글 중에는 ‘톰 홀랜드가 줄리엣이냐’ ‘로미오가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요' 등 리버스가 실제로 읽으면 크게 상처받을 만한 혐오 발언이 무척 많았습니다. 그리고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하는 셰익스피어의 작품 ‘로미오와 줄리엣’의 원작을 훼손하고 있다'는 비난도 이어졌습니다.
인종이 원작 훼손이라면, 이미 수백 번 훼손
로미오와 줄리엣이 어떻게 원작을 훼손했다는 걸까요? 로미오와 줄리엣은 역사상 가장 유명한 셰익스피어의 초기 희곡입니다. 원수 집안의 젊은 남녀가 사랑하다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다는 전형적인 사랑 이야기죠. 작품은 몬테규 가문과 캐플릿 가문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만나 싸우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본격적인 갈등의 시작점이 바로 머큐쇼의 부상입니다. 철없는 로미오가 새 여자친구를 만들기 위해 파티에 갔고, 줄리엣과 사랑에 빠졌는데요. 캐플릿 가문의 티볼트가 자신의 집안 행사에 몬태규 가문의 로미오가 온 것을 알고 분노해 싸우다 머큐쇼가 다친 거죠.
비겁한 로미오는 줄리엣의 사촌과 싸우다 자신의 사랑을 그르치는 게 싫어 뒤로 빠져 있었어요. 그런데 친구인 머큐쇼가 다치자 화가 난 로미오가 티볼트를 죽이게 됩니다. 가뜩이나 이룰 수 없었던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은 더욱 더 불가능한 것이 되어 버렸고, 두 사람은 결국 너무 사랑해서 자살하기에 이릅니다. 두 사람의 비극으로 몬태규 가문과 캐플릿 가문은 화해를 한다는 게 바로 원작의 내용입니다.
사실 셰익스피어의 모든 작품 중 로미오와 줄리엣은 그다지 문학성을 인정받는 작품은 아닙니다. 하지만 가장 유명한 작품인 건 확실합니다. 이 작품이 세계 곳곳에서 영화, 연극, 뮤지컬, 오페라 등 다양한 방법으로 변주돼 퍼져나간 덕분이죠. 중요한 건 거의 모든 작품이 한 번도 원작을 그대로 재현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논란이 되고 있는 흑인 배우 부분을 먼저 볼까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등장한 1996년 버전의 영화에는 머큐쇼 역할을 맡은 헤롤드 페리뉴가 흑인이었죠. 당시 작품에서 몬테규 역할은 라틴계 배우 존 레귀자모가 맡았어요. 영화는 ‘몬태규 가문의 흑인 배우 헤롤드 페리뉴 때문에 분노한 미국인 배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라틴계 배우 존레귀자모를 죽이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지금 줄리엣 캐스팅을 비난하는 이들의 말대로라면 1996년 버전의 영화는 이탈리아 베로나를 다문화 사회로 묘사했으니 고증부터 틀려먹은 셈입니다.
주연이라 안돼? 한국인 줄리엣도 있어요
‘그들은 조연이었다’라는 반박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차례 무대에 오른 뮤지컬 ‘로미오와 줄리엣’을 볼까요. 배우는 남녀 모두 한국인이었죠. 만약 이 작품이 해외에서 공연되는데 지금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저 한국인은 나의 줄리엣이 아니다’라고 말한다고 생각해보세요. 무척 화가 날 거 같아요. 흑인 줄리엣도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지난 2013년에는 브로드웨이에서 흑인 여배우 콘돌라 라쉐드가 줄리엣 역을 맡은 ‘로미오와 줄리엣’ 공연이 열리기도 했어요. 콘돌라 라쉐드는 처음으로 줄리엣 역을 맡은 흑인 여성입니다. 다음 달 우리나라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세계적인 현대무용가 매튜 본의 음악극 ‘로미오와 줄리엣’이 막을 올리는데요. 줄리엣 역을 맡은 배우 중 한 명은 흑인 안무가 겸 무용수 모니크 조나스입니다. 계속해서 백인이 아닌 줄리엣 사례를 찾을 필요가 있을까요.
한국의 대표 뮤지컬 제작사 EMK가 제작한 창작 뮤지컬 중에는 마타하리, 베토벤, 벤자민 버튼, 베르사유의 장미 등 서구 역사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 많습니다. 이 작품들 역시 한국 배우가 연기하지만 세계 곳곳으로 수출되고 크게 사랑받고 있어요. 리버스가 줄리엣을 맡을 수 없는 이유가 ‘로미오와 줄리엣의 배경이 이탈리아이기 때문’이라면 그 주장은 틀린 겁니다. 이 위대한 작품은 이미 전 세계에서 여러 인종이 여러 언어로 연기하고 있으니까요. 유독, ‘줄리엣 역할을 맡은 흑인 리버스’에게만 그 화살이 쏟아지는 건 차별적입니다.
올리비아 핫세, 클레어 데인즈가 아니라는 비난
또 ‘리버스의 외모’가 마음에들지 않는다는 비난도 많습니다. 지금까지의 줄리엣은 올리비아 핫세, 클레어 데인즈였다는 거죠. 물론 외모는 각자의 취향입니다. 하지만 당사자가 직접 볼 수 있는 SNS에 외모 비하 발언을 쏟아내는 건 좀 다른 문제입니다. 지난 9일 800명 이상의 배우들이 리버스와 연대해 서한을 만들었는데요. 이 서한에는 “흑인 여배우들은 단지 취직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범죄를 저지른 것처럼 온라인에서 폭풍에 직면하게 된다”는 문구가 있습니다. 우리는 줄리엣을 사랑하지만 배우들에게 줄리엣은 ‘일’입니다. 돈을 받고 일을 하려고 하는데 ‘네 외모가 마음에 들지 않아, 그러니 일하지 말고 내 눈에 띄지마’라고 말하는 격인데요. 사실 현대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는 이와 같은 말을 공개적으로, 혹은 당사자에게 하는 행동을 ‘혐오’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제작사는 논란이 이어지자 줄리엣 역을 교체하기는 커녕 “이제 그만 멈춰달라”라는 내용의 성명서를 내놨습니다. “우리가 함께 일하는 예술가들이 인종 차별 없이 작품을 창작할 수있어야 하며,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모든 구성원을 지원하고 보호할 것”이라는 거죠. 또 “어떠한 학대도 용납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창작’이라는 단어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이 작품은 제작사의 창작물입니다.
논란과 관계 없이 오는 5월 11일부터 8월 3일까지 런던 요크공작 극장에서 공연될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은 전석 매진 됐다고 합니다. 해외에서는 웨스트엔드에서 성공하면 미국 브로드웨이로도 진출할 예정이라고 해요. 이 연극이 공연 문화가 발달한 우리나라에 들어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오리지널 공연이 가능할까요. 사실 저는 공연 담당 기자로서 리버스의 줄리엣이 궁금합니다. 백인 줄리엣과 흑인 줄리엣을 다르게 여기고, 흑인 줄리엣의 연기를 궁금해 하는 것도 어쩌면 제 안에 내재된 편견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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