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시대로 가라고 하면 어느 시기에 가서 살아야 할까 싶을 정도로 국난이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500년 존속할 수 있었던 힘 그 자체가 후대에 물려줄 수 있는 가장 큰 유산입니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으로 360만부에 달하는 판매고를 기록한 ‘국민 역사 만화가’ 박시백 화백이 최근 고려사 500년을 다룬 ‘박시백의 고려사’를 5부작으로 돌아왔다.
박 화백은 17일 서울 마포구 휴머니스트 사옥에서 열린 완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고려의 가장 큰 정체성은 ‘작지만 야무진 나라’”라며 “고려말의 개혁 노력들에도 불구하고 숱한 내분 이후 어떻게 멸망의 길로 갔는가를 그려내고자 했다”고 밝혔다. 역사 서술에 있어 정사(正史)를 중시하는 그는 고려의 정사인 ‘고려사’를 기반으로 고려사를 서술했다. 1973년 국보로 지정된 ‘조선왕조’ 실록과 달리 ‘고려사’는 2021년에 들어서야 국가지정문화재로 기정됐다.
박시백의 고려사에는 주요 등장인물이 150명 이상 등장한다. 이 캐릭터들은 ‘고려사’ ‘고려사절요’ 삼국사기 등 사료 기록에 기초했다. 흥미로운 점은 그간 한쪽에 안대를 착용했던 ‘궁예’가 안대 없이 나오는가 하면 용과 같은 얼굴에 모난 턱과 넓은 이마의 ‘태조 왕건’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궁예의 역시 사료에 안대를 했다는 표현이 없기 때문에 안대를 쓰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했다는 설명이다.
그는 고려사를 다루면서 가장 인상적인 인물로 태조 왕건을 꼽았다. 박 화백은 “시대의 요구를 가장 정확히 파악했고 어떤 처신과 전략이 필요한지 자유롭게 볼 수 있었던 지도자”라며 “분열됐던 삼한을 통일한 시대에 걸맞는 지도자의 역할을 해냈다”고 평가했다. 또 왕이 아닌 인물 중에는 고려의 충신인 정몽주를 꼽았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가 조선시대에 쓰인 만큼 조선 건국 이후의 시선이 반영돼 정몽주는 상대적으로 폄하돼 있다는 것. 그는 “당시 고려가 무너져가고 사실상 이성계가 모든 정권을 장악하는 상황에서 내관, 궁녀들까지도 이성계 측에 줄을 댔을 상황”이라며 “무장력도 없는 정몽주가 이성계가 갖고 있는 약점을 정확히 간파하고 이성계를 코너로 몰고 가는 데 거의 성공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이방원(조선 태종)이 나서지 않았더라면 역사가 바뀌었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한 인간이 보여준 에너지 측면에서 최고의 정치가로 꼽는다”고 덧붙였다.
동시에 재평가하게 된 인물들도 있다. 김부식의 경우 단재 신채호 선생이 묘청과 대비해 김부식을 사대주의자로 폄하했다는 설명이다. 박 화백은 “김부식은 당대 최고의 학자로서 삼국사기 저술을 책임졌다”며 “묘청의 난 진압 과정에서도 백성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입장을 시종일관 견지하는 등 원칙에 입각했던 정치가였다”고 말했다.
올해 환갑을 맞은 그에게는 20년 간의 조선사, 고려사를 마무리했다는 이정표도 달성하게 됐다. 그는 역사 만화에 입문하기 전에는 한겨레신문사에서 시사만화가로 만평 코너에 만화를 연재했다. 그러다 2001년 돌연 신문사를 그만두게 됐다. 그는 “한겨레를 그만둘 때는 ‘내가 빨리 안 하면 다른 사람이 해버릴 것 같다’는 절박감에 조선왕조실록을 사기도 전에 퇴사를 했다”며 “잃을 게 많지 않다는 마음이 오히려 저를 도와주는 방향으로 작동한 것 같다”고 말했다. 2003년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권을 출간한 이후 이십년 간을 조선과 고려의 역사에 바쳤다. 지금은 360만부의 판매고를 기록했지만 반응이 없던 때도 있었다. 그는 “조선왕조실록의 경우 7권까지 연재하는 동안 이대로 탄력이 붙지 않으면 중단될 수도 있다는 위기감 있었다”며 “10권 넘어가며 그 걱정은 사라졌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많은 이들이 10년을 한 것을 좋게 평가하는데 사실 누구든 자신의 일을 그렇게 하고 있다”고 말했다.
겸손하게 말하지만 박 화백은 집을 작업실 삼아 반려견 산책 시간과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작업을 한다. 하루에 열두 시간 넘게 작업할 때도 흔하다. 지금은 한글 파일에 노트 기록을 남기고 태블릿으로 밑그림을 그리지만 이전에는 모두 직접 손으로 쓰고 그렸다. 조선왕조실록을 그릴 당시에는 역사를 공부하고 콘티 작업까지 하는 시간이 전체 책을 쓰고 만화를 그리는 기간과 비슷했다. 여전히 손맛이 중요한 그는 웹툰은 다른 영역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웹툰 도전은 엄두도 못 낼 만큼 한국 만화가 엄청나게 성장하고 기법과 소재도 정말 다양하고 대단하다”며 “만화하는 사람으로서 굉장히 반갑고 자랑스럽다”고 전했다.
조선과 일제강점기에 이어 고려까지 다룬 그가 만약 타임머신을 타고 예전으로 갈 수 있다면 어디를 택할까. 그는 조선 전기를 꼽았다. 박 화백은 “세계 정치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수준 높은 토론 정치, 민주 정치적 요소를 갖고 잘 발현시킨 시기였다”며 “조선 전기의 수준 높은 토론 문화와 기록 문화는 현재의 우리가 분발해야 할 수준”이라고 전했다.
한편, 그는 신병주 건국대 교수, 김학원 휴머니스트 대표와 함께 유튜브 ‘연남책빵’에서 ‘박시백의 고려사’를 진행하며 고려사의 뒷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현재까지 20편이 공개됐으며 총 80편을 공개할 예정이다. 고려사 출간부터 완간까지 박 화백을 부추겼다는 김 대표는 “지금까지 조선의 관점으로 고려를 봐왔다”며 “고려가 어떤 사회고 어떤 유산을 남겨줬는지 고려 자체에 대한 조망이 필요한 때”라고 전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