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에 1980년 광주 5.18 민주화운동을 보도한 테리 앤더슨 전 AP통신 특파원이 향년 76세로 21일(현지시간) 별세했다.
AP통신에 따르면 앤더슨 전 특파원은 뉴욕주 그린우드레이크의 자택에서 별세했다고 보도했다. 고인은 최근 심장 수술을 받았지만 정확한 사망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1947년 미 오하이오 로레인에서 태어난 앤더슨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해병대에 입대해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귀국한 뒤엔 저널리즘을 공부하고 AP통신에 입사했다.
1980년 AP 통신 일본 특파원으로 있던 앤더슨은 5·18 민주화운동 현장을 직접 찾아 한국에서 벌어진 국가 폭력의 실상을 보도했다. 당시 13건의 기사를 통해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시민들의 모습'을 기록했다.
문화체육관광부 옛 전남도청복원추진단은 2020년 앤더슨 전 특파원이 1980년 5월 22일부터 27일까지 광주 현장에서 취재한 기사 원고를 공개하기도 했다.
고인은 취재를 통해 ‘광주 폭동’이라고 주장한 정부 발표와 정반대의 사실을 보도했다.
그는 “광주 시민들 시위가 처음에는 평화롭게 시작됐지만, 공수부대들이 5월 18~19일 시위자들을 무자비하게 소총과 총검으로 진압하면서 격렬한 저항으로 변했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또 계엄군이 외곽으로 물러나 있던 5월 23일 시민들이 거리를 청소하고 곳곳에 있는 잔해와 불탄 차들을 치웠다는 내용도 기록했다.
2020년 발간된 책 ‘AP, 역사의 목격자들’에서 “계엄군이 ‘폭도’ 3명이 죽었다고 말했지만,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광주 시내를 돌아다니며 눈에 띄는 시신을 모조리 센 결과 첫날 한 장소에서만 시신 179구를 발견했다”고 말했다.
고인과 광주를 함께 취재했던 존 니덤은 1989년 LA타임스 기고에서 “앤더슨이 전남도청이 내려다보이는 호텔 방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사진을 찍다가 계엄군의 총격을 받았다”는 일화를 소개했다. 계엄군의 경고에도 사진을 계속 찍자 처음에는 호텔 방을 향해 머리 높이로 사격하다가 이후에는 가슴 높이로 총을 쐈고, 고인이 바닥에 납작 엎드린 덕분에 총알을 피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이후 레바논 특파원으로 일한 앤더슨은 1985년 3월 레바논 무장세력인 헤즈볼라에게 납치돼 7년 가까이 구금됐다가 풀려나기도 했다. 당시 그는 결혼을 앞둔 상태의 예비 신랑으로, 약혼녀는 임신 6개월이었다.
구금 7년 만인 1991년 12월 석방됐지만,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로 고통받았다.
그는 이란 정부가 그의 납치에 역할을 했다는 법원 판결에 따라 이란 동결 자금 수백만 달러를 보상으로 받았다. 그러나 보상금 대부분을 투자로 잃었으며, 2009년엔 파산 신청을 했다.
플로리다 대학에서 저널리즘을 가르치던 그는 2015년 은퇴했고 이후 버지니아주 북부에 있는 작은 말 농장에서 지냈다.
앤더슨의 딸은 그가 사망 일주일 전 "충분히 살았고, 충분히 많은 일을 했기 때문에 만족한다"고 대답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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