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이 없어 공원이나 거리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노숙자들에게 벌금을 부과하거나 징역형을 선고하는 법은 과연 정당한 지를 두고 미국 내에서 뜨거운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미국 수정 헌법 제8조는 '과다한 보석금이나 벌금 또는 잔인하고 비정상적인 형벌'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노숙자에게 노숙 자체로 형벌권을 행사하는 게 적절한 지를 두고 미 연방대법관들 사이에서도 입장이 엇갈린다.
미 전역이 노숙자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가운데 미국 서부 오리건주의 소도시 그랜츠패스에서는 노숙자를 처벌한 당국과 위헌을 주장하는 노숙자들 간의 법정 다툼이 대법원의 최종 판결을 앞두고 있다. 노숙자 처벌의 정당성을 놓고 내려지는 연방대법원의 첫 판결인 만큼 그랜츠패스 뿐만 아니라 모든 미국인들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CBS 방송 등은 23일(현지시간) 오리건주의 한 도시에서 시행한 노숙 처벌 규정의 위헌 여부를 두고 연방대법원이 고심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번 재판은 2018년 인구 4만 명의 소도시 그랜츠패스시의 노숙자 3명이 노숙을 금지한 시 규정이 위헌이라며 소송을 제기하면서 시작됐다. 해당 규정에 따르면 그랜츠패스에서는 공원 등 공공장소에서 야영을 하거나 잠을 자는 행위가 불법이며, 이를 어길 경우 최소 295 달러(약 40만 원)의 벌금에 처할 수 있다. 여러 차례 규정 위반으로 적발될 경우 30일간 공원에 접근이 금지되며, 이후에도 접근 금지를 어기고 공원에서 야영을 하면 불법 침입으로 간주하고 최대 30일의 징역과 1250 달러(약 170만 원)의 벌금을 물어야 한다.
노숙자 측은 당시 이 규정이 미국 수정헌법 제8조를 위반했다며 집단 소송을 제기했다. 사실상 전국 60여 만 명에 달하는 노숙자들을 대변한 법적 투쟁 개념이다. 오리건주 연방지방법원은 해당 규정이 수정헌법 제8조 위반이라며 노숙자 측의 손을 들어줬다. 법원은 시 당국이 야간에 해당 법을 집행하는 것을 금지했으며 낮에도 24시간의 사전 통보 없이는 법을 집행할 수 없게 했다. 이후 시 측의 불복으로 열린 항소심도 해당 규정이 위헌이라는 하급심의 판결을 그대로 유지했다. 그랜츠패스 시 당국은 2심 결과에도 불복해 상고를 제기했고, 연방대법원에서 최종 결론이 내려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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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사건의 쟁점은 해당 법이 위헌인지와 연방대법원이 행정 당국의 법 집행에 관여하는 것이 적절한 지 여부다. 대법원 심리가 진행 중인 가운데 대법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진보 성향의 소냐 소토마이어 대법관은 "수면이 생물학적으로 필수적인 행위이며 집이 없거나 노숙자 쉼터에 공간이 없는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야외에서 잠을 자야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보수 성향의 닐 고서치 대법관은 "공공 화장실이 없다고 해서 사람들이 수정헌법 제8조에 따라 노상방뇨를 할 권리를 갖는 것이냐"고 반박하며 처벌의 당위성을 주장하고 있다.
대법원장을 포함해 총 9명으로 구성된 연방대법원은 보수 성향 대법관 6명, 진보 성향 대법관 3명으로 보수 우위 구조다. 일방적인 결과가 내려질 것 같지만 보수 성향의 대법관 사이에서도 다른 의견이 나오고 있다. 보수 성향인 브랫 캐버노 대법관은 "노숙자에게 벌금을 매기는 것이 집값 폭등과 노숙자 쉼터 부족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것"이라면서 "대법원이 이번 판결을 통해 각 지자체의 정책적 결정에 과하게 개입하는 결과를 빚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연방대법원의 결정은 오는 6월 말께 이뤄질 예정이다.
대법원 결정에 따라 노숙자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각 주들이 노숙 방지법을 도입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로이터 통신은 "대법원 판사들이 지역 법률의 합법성을 놓고 씨름하면서 전국의 노숙자들이 위기에 직면했다"고 보도했다. 미 정부는 노숙자 수가 60여만 명 이상으로 추산하고 있는데, 대법원 결정에 따라 당장 이들이 숙식을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일 수 있다는 것이다. 노숙자 옹호 단체들은 "법이 단순히 노숙자라는 이유 만으로, 그리고 공공장소에서 잠을 자는 것과 같이 피할 수 없는 행동에 대해 사람들을 범죄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일부 보수 성향의 대법관들 역시 수 많은 노숙자들이 처한 비참한 상황을 고려해 일방적인 결정을 내리기는 쉽지 않을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노숙자 문제는 미 대선 후보들 사이에서도 논쟁거리다. 노숙자 해결 방안을 두고 민주당은 노숙자 급증에 따른 추가 지원이 필요하단 입장인 반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이민자 문제와 마찬가지로 노숙자들을 관련 시설에 강제 수용하는 등 규제 및 치안 정책이 필요하다며 강경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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