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국내 대형 설계 업체들의 수익성이 뒷걸음질 친 것으로 나타났다. 부동산 시장 침체에 주택과 오피스, 호텔 등 건설 수요가 전방위적으로 줄어든 여파로 풀이된다. 프로젝트 파이낸싱(PF) 위기에 자금난을 겪는 시행사가 많아지면서 설계비를 받지 못하는 사례도 늘어나고 있다.
23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설계업체 빅5(삼우·희림·해안·건원·간삼)의 총 매출액은 1조 769억 원으로 6% 증가한 반면 영업이익은 633억 원으로 12% 감소했다. 희림종합건축사사무소의 영업이익은 2022년 101억 원에서 지난해 64억 원으로 약 37% 줄었고, 같은 기간 건원도 98억 원에서 35억 원으로 약 64% 감소했다. 삼성물산의 계열사로 반도체 등 하이테크 비중이 높은 삼우종합건축사사무소만 유일하게 영업이익이 약 18% 늘었다.
국내 설계업체들은 2021~2022년 사상 최대실적을 기록했다. 펜데믹에 해외여행길이 막히자 반사이익을 얻은 국내 호텔과 리조트 등 레저 업계에서 발주가 쏟아진 데다 집을 보수하려는 수요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금리와 PF 시장 경색에 지난해부터 일감이 눈에 띄게 줄어든 상황이다. 대한건설협회에 따르면 건축물 공급 선행지표인 지난해 인허가와 착공 면적은 전년 대비 각각 약 26%, 27% 감소했다. 설계업계의 한 관계자는 “부동산 시장이 호황일 때에는 설계 발주를 골라서 한다는 얘기까지 나왔지만 작년 하반기부터 상황이 반전됐다”며 “소규모 건축에 매출은 유지되고 있지만 수익성이 큰 비주거용 수주가 감소한 게 타격이 컸다”고 말했다.
설계를 하고도 설계비를 제대로 지급하지 못하는 사업장이 늘어난 것도 수익성 저하에 영향을 미쳤다. 지난해 국내 빅5 설계 업체의 대손상각비는 2022년 2억 원에서 지난해 175억 원으로 급증했다. 대손상각비는 거래처 부도 등의 이유로 회수가 불가능한 매출채권을 뜻한다. 설계 업체는 건설사와 마찬가지로 공정률에 따라 설계비를 받는데, PF 대출만기 연장 불발에 공사가 엎어지거나 멈추는 현장이 많아지면서 일명 ‘떼인 돈’이 많아진 결과로 풀이된다. 희림은 5억 원의 설계비를 받지 못했다며 한 부동산 업체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고 현재 1심이 진행 중이다.
공사비 급등에 주택 분야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재개발·재건축 등 정비사업이 부침을 겪는 것도 설계 업계의 어려움이 가중되는 요인 중 하나다. 그나마 서울 재건축 대어로 꼽히는 압구정 2구역·4구역(디에이건축), 3구역(희림), 5구역(해안)이 모두 설계사 선정을 마무리 지은 상태다. 한남2구역(나우동인)과 한남4구역(에이앤유)도 설계사 선정을 마쳤다. 한 대형 설계업체 관계자는 “1기 신도시 재건축이 속도를 내지 못할 경우 앞으로 대형 정비사업 수주물량은 제로에 가깝다”고 말했다.
영업 활동을 하는 건축사 수도 감소했다. 대한건축사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누적 등록건축사 수는 1만 8771명으로 전년(1만 8872명)대비 약 0.5% 감소했다. 2012년 건축사등록원제도가 신설된 이래 매년 증가해왔던 등록건축사 수가 감소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대한건축사협회 관계자는 "5년 마다 돌아오는 갱신 기간이 겹쳤던데다 경영 악화에 따른 폐업 등이 늘어난 것도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