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통화 당국의 잇단 구두 경고에도 불구하고 엔화 가치가 달러당 155엔대 후반까지 떨어지며 34년 만의 최저치를 기록했다. ‘미국 금리 인하 기대감 후퇴’라는 대외 변수가 가장 큰 원인이지만 달러 매수 수요가 저조한 일본 내부의 구조적인 상황 역시 과도한 엔저를 부추기는 요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25일 도쿄 외환시장에서 엔화 가치는 달러당 155.73엔을 돌파하며 1990년 6월 25일(장중 155.87엔) 이후 34년 만에 낮은 수준으로 하락했다. 최근 발표된 미국의 주요 경제지표들이 ‘여전히 뜨거운 경기’를 시사하면서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금리 인하 시점이 뒤로 밀린다는 전망이 확산한 데 따른 것이다. 미국의 금리 인하 시점이 멀어질수록 일본의 낮은 금리가 부각되며 ‘달러 매수, 엔화 매도’ 흐름이 강해지는 양상이다.
탄탄한 미국 경제가 엔저의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지만 일본의 구조적인 요인들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일본 정부의 구두 개입이 시장에서 좀처럼 ‘먹히지 않는’ 배경에는 자국 내 강한 달러 매수 수요가 꼽힌다. 엔저 효과를 톡톡히 누리는 수출 기업과 달리 수입 기업들은 해외에서 들여오는 원자재 가격 등이 오르며 달러 수요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 미쓰비시UFJ신탁은행의 오카다 유스케 조사역은 “엔저 심화에 따른 비용 증가를 피하려 수입 기업들이 달러 조달을 서두르고 있다”고 설명했다.
해외 정보기술(IT) 기업에 대한 지불이 증가하는 현상도 엔화 매도를 부추기는 요인이다. 일명 ‘디지털 적자’로, 미국 넷플릭스·아마존 등 해외 플랫폼에 내야 할 비용이 늘면서 국제수지에서 디지털 부문의 적자가 늘고 있다. 지난해 일본의 디지털 적자는 전년 대비 16% 증가한 5조 5000억 엔이었다. 또 엔저로 실적이 불어난 수출 기업의 상당수가 투자 이익을 본국으로 보내지 않고 현지에 재투자하면서 ‘엔화 매수세’가 급감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시장의 관심은 통화 당국의 환율 개입 시점에 모아지고 있다. 최근 한미일 재무장관 회의과 주요 7개국(G7)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 회의의 공동성명을 통해 일본 정부가 개입에 나설 환경이 갖춰졌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스즈키 슌이치 재무상도 23일 참의원 재정금융위원회에 출석해 환율 개입에 대한 질문을 받자 “(개입의) 환경이 갖춰졌다고 받아들일 수 있다”고 언급했다.
26일에는 우에다 가즈오 일본은행 총재의 4월 금융정책결정회의 관련 기자회견이 열리는 가운데 내용에 따라 환율이 요동칠 수 있다는 전망이 제기된다. 시장은 ‘4월=금리 동결’에 무게를 두면서도 기자회견의 발언 수위와 내용에 집중하는 분위기다. 금리·환율·물가 영향 등에 대한 우에다 총재의 발언을 통해 금리 인상 폭과 시점을 가늠해볼 수 있어서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fA)의 야마다 슈스케 연구원은 “일본은행의 가파른 매파(금리 인상) 전환이 전망되지 않기에 이번 회의는 엔·달러 상승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며 “이 경우 재무성이 환율 개입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다만 환율 개입이 얼마나 효과를 거둘지는 미지수다. 제프리스의 브래드 베첼 외환전략가는 “미일 중앙은행의 전망이 바뀌기 전까지는 엔저 흐름에 대항하는 게 매우 어려울 것”이라며 “이러한 기조가 바뀌려면 인플레이션과 경제성장률의 둔화가 미국에서 확인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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