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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대중가요[서우석의 문화 프리즘]





대중가요를 생각해 보자. 한국의 대중가요는 서양음악의 영향 아래 태어났다. 그 첫 모습은 창가다. 1876년 새문안교회 교인들이 지어서 부른 ‘황제탄신경축가’가 창가의 효시인 것으로 전해 온다. 구한말 등장한 창가, ‘권학가’의 가사는 서구 문명을 부지런히 배우자는 내용을 담고 있다. 3·1운동(1919년)을 계기로 등장한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로 시작하는 ‘희망가’ 역시 노랫말은 개화가사다.

1920년 이후 일본의 통치가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전환되면서, 노래는 상류층 예술가곡과 평민층 유행가의 두 갈래로 나누어진다. “양반/상놈”의 계층 때문이었을 것이다. 가곡은 상류층, 유행가는 평민층의 노래가 된다.

30년대 ‘황성옛터’(1932, 이하 음반출간 년도), ‘목포의 눈물’(1935) 등이 SP음반을 통해 유행한다. 노래의 가사는 모두 일제 치하의 슬픔을 담고 있다. 해방을 맞이한 감격은 ‘신라의 달밤’(1947)으로 시작되었고, 6.25 사변은, ‘굳세어라 금순아’(1953), ‘단장의 미아리 고개’(1956)를 낳는다. 한국 전쟁은 반상 의식을 무너트리고 상류층으로 하여금 유행가를 받아들이게 한다. ‘이별의 부산 정거장’(1953), ‘경상도 아가씨’(1953)가 그 결과였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로 시작하는 ‘전우야 잘 자라’(1950) 역시 상하층의 구별없이 널리 애창되었다. 초등학생까지 불렀던 군가였다.

70년대에 이르면 악보 읽기를 배운 한글 세대가 사회활동에 참여한다. ‘아침이슬’(1971)을 살펴보자. 낮은 음으로 시작한 “긴 밤 지새우고...”의 중얼거림은 “나 이제 가련다 저 넓은 광야...”로 치닫는다. 78년에는 대학가요제가 시작된다.

‘아침이슬’은 ‘Sad Movie’(1961)와 멜로디 구조가 같다. 주의력을 뒤에 둔 것이다. 오페라 ‘라 보엠’의 ‘사랑의 이중창’ 역시 같은 구조이지만, 규모가 훨씬 크다. ‘theme-ending’을 국어 교과서 용어를 빌려, 미괄법이라고 옮겨 부르자.

미괄법 노래는 이후 많은 영향을 끼친다. ‘사랑의 미로’(1985)는 후반의 “그대 작은 가슴에 심어준...”에 이르러 청자의 가슴을 친다. 박정희 대통령이 좋아했던 ‘그때 그 사람’(1978) 역시 미괄 선율에 속한다. 이즈음 대중적 상투성을 벗어난 가사도 등장한다. ‘희나리’(1985), ‘이연’(1990)이 그 좋은 예일 것이다. ‘뽕짝’유행가 가사에 대한 저항이었을 것이다.

90년대, 대학가요의 열풍은 숨을 죽인다. 미국 랩(rap)의 영향 이후, 한국의 가요는 새 영역인 ‘강남 스타일’(2012)로 들어선다. ‘강남 스타일’을 포함한 K팝은 부르는 노래가 아니다. “노래부르기”가 직업인 노래방 도우미들도 K팝 노래 하나 불러 보라고 하면 못한다고 대답한다.

K팝은 국내용이라기 보다는 국외용이며, 수출 가요다.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 보는 노래다. 둘의 차이는 축구경기를 보는 것과 직접 축구를 하는 것과의 차이에 비교된다. 이제 세계의 팝은 축구를 넘어서 아무나 따라 할 수 없는 야구 경기가 된 듯하다.

그래도 인간의 가창 욕망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커피샵 만큼이나 많은 노래방이 이를 증언한다. 70년대 ‘뽕짝’은 ‘트롯트 가요’로 이름을 바꾸고, 개명을 기념하듯 ‘쌍쌍 파티’로 이어진다. 주현미의 ‘쌍쌍 파티’는 카세트에 담겨 대 유행에 올라 통계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많이 팔려 나갔다. 최근 TV주도의 ‘트롯트 경연’ 역시 그러한 열풍을 꿈 꾸고 있다.



스마트 폰 이후 음악은 디지털 매체에 기반하게 된다. 무엇보다 화면이 중요하다. 화면은 춤으로 채워지고, 음악은 춤과의 분리 이전으로 돌아간다. 타악기가 중요해지면서 노래는 멜로디에서 리듬패턴으로 옮겨간 느낌을 준다.

본령이 부르는 노래였던 예술가곡도 차츰 사라진 것이 사실이다. 한때 유행한 ‘그리운 금강산’(1961) 역시 부르는 노래를 살짝 벗어나 있는 노래다. 노래는 차츰 춤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변화와 무관한 영역이 아직 남아있다. 음악대학 구성원들과 그곳 출신의 음악인들이다. 전국의 음대를 생각하면 그 수가 만만치 않을 것이다. 자치단체의 교향악단과 합창단, 교회의 합창단, 그외의 합주단들도 여기에 포함된다. 이들의 삶은 대부분 열 살이 되기 전부터 클래식 음악과의 접촉으로 시작된다.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 등의 서양고전 음악은 이들의 몸에서 떼어 낼 수가 없을 것이다. 사회적 관점에서 볼 때, 이들의 활동은 대중음악의 작곡이나 연주, 감상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직업이 음악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대중가요로부터 분리는 그만큼 심각한 것이다.

고전음악과 대중음악의 차이는 무엇일까? 단순한 비유로 설명해 보자. ‘황성옛터’(1932)나 ‘타향살이’(1934)가 마을 길을 2, 3분 걷는 체험이라고 한다면 베토벤의 교향곡은 유럽 왕궁의 정원과 실내를 30분 동안 걷는 체험일 것이다. 이들이 체험한 음악적 공간은 차원이 다르다. 귀족과 평민의 생각과 삶이 그 차원이 다르듯 말이다.

가요를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다. 두 번의 세계대전 이후, 왕과 귀족의 지배는 해체되었다. 이와 더불어 유럽의 고전음악 생산도 사라졌다. 생산을 촉구하고 평가하던 귀족층이 쇠락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고전음악을 자처하는 사이비 음악이 행세를 하는 시대가 되었다. 고전음악의 시대가 다시 나타날 리도 없고, 대중음악이 클래식과 같은 심오한 공간을 창조해 낼 수도 없을 것이다. 음악 전공자들도 이를 이해하고, 사고의 유연성을 지녀야 한다. 쇤베르크(Schönberg) 식의 무조성 음악만이 음악이고 그 이전의 음악은 퇴물이라는 작곡과 교수들과 학생들도 부르는 노래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러한 시대가 와야겠지만, “올까?”하는 의문이 든다.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약력]서울대 명예교수

[저서]시와 리듬(1981, 개정판 2011), 음악을 본다(2009), 세계의 음악(2014) 등

[번역]기호학 이론(U. Ecco, 1984), 서양음악사(D. J. Grout,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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