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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나라 곳간 생각 않고 ‘돈풀기 잔치’할 때인가

■서정명 디지털 총괄부국장

양당 사사건건 정쟁 '퍼주기 예산'경쟁만

'전국민 25만원'에 기초연금 상향 맞서

'돈 뿌리기'에 몰두…재정위기 방어해야





궁내대신 렐드레살이 걸리버를 찾아와 나라 속사정을 털어놓는다.

“다른 나라 사람에게 번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이 나라는 두 개의 큰 어려움에 직면해 있습니다. 외부적으로는 적의 침략에 항상 노출돼 있고 내부적으로는

격렬한 당쟁과 정쟁에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답니다. 구파 트라멕산 정당 사람들은 높은 구두 굽을 신고 신파 슬라멕산 사람들은 낮은 굽을 신는답니다. 양당 사람들은 적대감이 너무나 커 함께 식사하거나 술을 마시지도 않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려고 하지도 않지요.” 아일랜드 작가 조너선 스위프트가 18세기에 쓴 ‘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소인국 ‘릴리풋(Lilliput)’ 이야기다.

궁내대신이 한숨을 지으며 걸리버에게 말한다. “이대로 가다가는 국민 전부가 이 당과 저 당으로 나뉘어 큰 소동을 벌일 것 같습니다.”

집권 여당인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이 민생 지원과 연금 개혁, 기업 규제 혁신 등을 놓고 칼날을 겨누고 있다. ‘우리 방안이 최고선(善)’이라며 압박 강도를 높이고 있다. 대화와 타협은 찾아보기 어렵다.

민주당은 ‘전 국민 1인당 25만 원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위한 특별법을 22대 국회 개원 직후 발의해 처리하겠다고 공식화했다. 13조 원의 예산이 필요하다. 국민의힘과 정부가 재정 악화를 이유로 수용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보이자 국회 과반 의석을 앞세워 정부의 예산 편성권마저 무용지물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국민의힘은 헌법이 규정한 정부의 예산 편성권을 침해하는 것이라며 헌법재판소에 제소하기로 했다. 민주당은 이재명 대표의 총선 공약인 만큼 강행하겠다는 입장이어서 여야 공방은 한층 격화될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실과 국민의힘은 기초연금 40만 원을 앞세워 야당의 돈 뿌리기에 정면 대응하겠다는 태세다. 65세 이상 중 소득 하위 70%가 받는 기초연금은 1인 가구에 최대 33만 4810원, 부부 가구에는 53만 5680원을 준다. 올해 기초연금 예산은 24조 원인데 월 40만 원으로 올리면 연간 최소 30조 원 이상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된다.

국민연금 개혁 방안도 여야 합의를 도출하지 못하고 다음 국회로 넘어간다. 양당은 보험료율은 현행 9%에서 13%로 올리는 데 의견을 같이했지만 소득대체율을 놓고서는 국민의힘 43%, 민주당 45%로 팽팽히 맞서고 있다. 소득대체율이 높을수록 가입자가 받는 연금액이 많아지지만 연금재정에는 그만큼 부담이 된다. 여야는 앞으로도 민생 살리기 명분으로 곳간 풀기 경쟁을 이어갈 게 뻔하다. 신선놀음(돈 뿌리기)에 도끼 자루(재정) 썩는 줄 모른다는 얘기가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나라 살림은 구멍이 숭숭 뚫리고 있다. 올 1분기(1~3월) 관리재정수지는 75조 원대 적자를 기록했다. 월별 집계를 시작한 2014년 이후 분기 기준 최대 규모다.

올해 전망하는 관리재정수지 적자(91조 6000억 원)의 80%를 3개월 만에 넘어선 것이다. 지난해 국가 채무는 1092조 원으로 국내총생산(GDP)의 50%에 근접했고 정부가 내년에 갚아야 할 국채만 100조 원을 넘는다. 재정 상황이 엄중한데도 민주당 정책위의장은 “재정 건전성 고수 방침, 추경 거부 등 반(反)민생 정책을 전면 폐기하라”며 한가한 소리를 하고 있다.

글로벌 경제의 불확실성이 증폭되는 현실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묻지 마 돈 풀기’ 경쟁이 아니라 여야가 명확한 재정준칙을 마련해 나라 곳간을 튼튼하게 만드는 일이다. 앞으로 저출생·고령화로 재정지출을 늘려야 할 부문이 쏟아질 것으로 예상되는데 정작 필요한 곳에 재원을 집중하기 위해서라도 지출 내용을 꼼꼼하게 따져봐야 한다.

재정준칙은 관리재정수지 적자 한도를 GDP 대비 3% 내로 관리하되 국가채무비율이 60%를 초과하면 2%내로 줄이는 것이 핵심이다. 박근혜·문재인 정부 때도 재정준칙 도입에 나섰지만 이해관계가 엇갈려 실패하고 말았다.

무디스·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등 국제 신용평가기관이 한국 경제 신용 등급을 결정하는 가장 큰 변수는 재정 건전성이다. 곳간이 텅텅 비면 국가는 무너진다. 아르헨티나가 그 수렁에서 허덕이고 있다. 높은 굽, 낮은 굽으로 나뉘어 싸움질할 만큼 우리 상황이 녹록지 않다. 여야는 민생을 빙자한 돈 뿌리기 경쟁을 거두고 객관적인 재정준칙부터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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