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숙종 20년(1694년) 62세의 나이로 오늘날 도지사에 해당하는 제주 목사로 부임한 이익태(李益泰·1644~1704년)가 2년 동안의 제주 통치 이후에 남긴 ‘지영록(知瀛錄)’에는 17세기 제주뿐 아니라 동아시아 해양사에 관한 흥미로운 자료가 많이 담겨 있다. 그중에 숙종 16년(1690년) 음력 5월 9일 제주 서귀포에 표류해 도착한 중국 휘주(徽州) 상인에 대한 기록이 있다. 그의 이름은 정승원(程勝遠)이다.
휘주 상인은 안휘성 휘주부 출신의 상인으로 명·청 시대 산서 상인과 함께 중국의 상업계를 좌우했던 최고의 상인 집단이었다. 통상적으로 휘주 상인은 16세기 왜구와 통교했던 왕직(王直)의 비참한 최후를 마지막으로 해양 진출 대신 대운하를 비롯해 강남 등 내륙의 경제 중심지에서 상권을 확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명에서 청으로 왕조가 교체된 후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바다로 진출해 일본으로 무역하러 가던 중 갑자기 폭풍을 만나 제주 서귀포에 표착한 것이다.
그런데 정승원은 ‘지영록’에 소개된 유일한 제주에 도착한 휘주 상인이 아니었다. 네덜란드인 하멜이 제주에 표착하기 1년 전인 1652년에도 휘주 상인 호명선(胡明善)이 다른 상인 200여 명과 제주에 표착한 바가 있고 1687년에도 휘주 상인 오성(吳聖)이 다른 70여 명의 상인과 함께 제주에 표착했다. 대운하 유통망을 잘 이용하던 휘주 상인이 절강, 복건 혹은 광동 출신 상인들의 전유물로만 알려진 일본과의 해양 무역에 끊임없이 참여했음을 보여주는 귀한 자료다. 1694년이라면 청의 강희제가 강력한 해금 정책인 천계령을 해제하고 상해·영파·하문·광주의 4개 항구를 열고 해관을 설치한 지 10년이 지난 시점이다. 정승원은 당시 해양 무역이 열리는 듯한 분위기에 편승해 일본까지 왕래했던 휘주 해상으로 왕직의 후예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후 정승원은 자신이 타고 온 선박의 수리를 제주 관아에 요청했고 결국 수리가 완료되자 다시 배를 타고 안전하게 청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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