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정치 권력 서열 2위로 평가돼온 에브라힘 라이시 대통령이 헬기 추락 사고로 사망한 것으로 전해졌다. 핵 개발과 가자지구 전쟁 등을 두고 서방국가들과 대립해온 이란인 만큼 이번 사고가 중동을 포함한 국제 정세에 몰고 올 파장에 세계 주요 국가들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돌발 변수에 직면한 이란 권력의 후계 구도 역시 자국 내에서 적지 않은 혼란을 불러올 것으로 전망된다.
20일(이하 현지 시간)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전날 라이시 대통령이 탑승한 헬리콥터가 이란 산악 지대에 추락해 탑승자 전원이 목숨을 잃었다. 이란 내각은 이날 성명을 통해 라이시 대통령의 사망 소식을 전하며 “아무런 차질 없이 국정이 운영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댐 준공식 참석차 동아제르바이잔주를 방문했던 라이시 대통령 일행은 일정을 마친 뒤 수도 테헤란으로 복귀하던 중 사고를 당한 것으로 전해졌다.
◇일각 암살 의혹 속 국영 TV “악천후” 원인=이번 사고의 직접적인 원인으로는 헬기 노후화가 지목됐다. 라이시 대통령이 탑승한 헬기는 미국 벨-212 기종으로 1968년 초도 비행을 했다고 IRNA통신은 보도했다. 이를 두고 AP통신은 이란 군용기 대부분이 팔레비왕조를 축출한 1979년 이슬람혁명 이전의 기종이라고 전했다. 이슬람혁명 이후 이란은 국제사회의 제재로 항공기 및 예비 부품을 조달하는 데 어려움을 겪어왔다. 일각에서는 오랜 적대국인 이스라엘의 암살 의혹도 제기되고 있지만 이에 대해 이스라엘은 즉시 자신들과 무관하다고 선을 그었다. 이란 국영 TV 등도 사고의 원인을 악천후로 규정했다.
◇하메네이 후계자 사망, 다음은 누구=라이시 대통령이 현 최고 지도자인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의 뒤를 이을 인물로 꼽혀왔던 만큼 그의 사망은 ‘후계자’를 둘러싼 이란 내 혼란을 촉발할 수 있다. 대통령 부재로 현재 이란은 모하마드 모흐베르 제1부통령의 권한 대행 체제로 전환된 상태지만 헌법에 따라 새로운 대통령을 50일 안에 선출해야 한다. 이는 단순히 행정 수반 선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고령인 하메네이의 뒤를 이을 승계 구도까지 고려해야 하는 상황인 만큼 시간이 촉박하다. 현재 거론되는 인물로는 라이시 대통령의 전임자인 하산 로하니 전 대통령과 하메네이 최고 지도자의 아들 모즈타바 하메네이 등이 있다. 후계 구도 승계 과정에서 권력 투쟁이 일어날 가능성도 제기된다.
◇누가 돼도 쉽지 않은 ‘집 안팎’ 상황=서방 언론들은 라이시 대통령의 후계자가 누가 되든 “가시밭길이 펼쳐질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강경 보수파인 라이시 대통령은 2021년 8월 취임 이후 시아파 맹주인 이란의 초강경 이슬람 원리주의 노선을 이끌어왔다. 논란이 된 2022년 ‘히잡 시위’를 유혈 진압했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를 준수하지 않은 채 핵 프로그램을 강행해왔다. 서방과는 적대 관계를 이어오며 각종 제재에 노출돼 이란 경제는 심각한 상황에 직면해 있다. 통화가치는 사상 최저로 추락했고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고통에 대규모 반정부 시위도 연일 일어나고 있다. 가디언은 “새로운 지도자는 내부 반대 의견뿐만 아니라 서방에 대해 더 강경한 노선을 취하고 러시아·중국과의 협력 강화를 바라는 자국의 분파적 요구까지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고 전했다.
◇발언 자제, 상황 예의 주시 서방=미국과 유럽 주요 국가들은 이란 내 상황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이란과 서방의 관계가 강경파인 라이시 정부 출범 후 급격하게 악화됐기 때문이다. 벨기에에 본부를 둔 민간 싱크탱크 크라이시스그룹의 알리 바에즈 이란 국장은 “이 상황은 내부적으로 심각한 정통성 위기에 처해 있고 역내에서 이스라엘 및 미국과 맞서고 있는 이란에 중대한 도전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중동 정책 변화는 없을 것” 지배적=다만 라이시 대통령의 사망이 핵 프로그램이나 가자지구 전쟁 등 기존 이란의 대외 정책에 변화를 불러오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주를 이룬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대통령의 사망으로 이란이 지정학적 문제에 대한 입장을 바꾸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며 “중동의 혼란 속에서 정권이 교체되는 것은 이란이 헤쳐나가야 할 또 다른 도전”이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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