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개발(R&D) 지원 과제 신청 첫날 홈페이지가 마비될 정도로 경쟁이 치열했습니다.”
국제보건기술연구기금(이하 라이트재단)이 지난달 공고한 감염병 R&D를 위한 연구비 지원 과제 신청에 대한 관계자의 설명이다. 라이트재단은 보건복지부와 빌&멀린다게이츠재단, 국내 제약사들의 참여로 설립된 민관 협력 비영리 재단으로 과제당 40억 원을 지원하고 있다. 지원 과제를 공고할 때마다 바이오 업체들의 신청이 몰리기는 하지만 이번 같은 경우는 처음 봤다고 관계자는 말했다. 그만큼 바이오벤처들의 자금 수요가 많다는 얘기다.
올해 1월 1차 사업에 이어 이달 2차 사업을 시작한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하 국가신약개발사업 신규 지원 대상 과제 선정 사업은 갈수록 경쟁률이 치솟고 있다. 사업단의 한 관계자는 “지난해는 차수당 평균 6대1의 경쟁률이었는데 차수별로 계속 경쟁률이 오르고 있다”면서 “선정 기업 심사에 보다 심사숙고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가신약개발사업단은 유효 물질에 대해서는 12억 원, 비임상 물질에 대해서는 20억 원, 임상 1상 물질은 35억 원, 임상 2상 물질에 대해서는 70억 원 내외의 R&D 자금을 지원하고 있다.
20일 업계에 따르면 신규 투자는 물론 기존 투자의 만기 연장이 이뤄지지 않으면서 바이오벤처들의 자금난은 예상보다 심각하다. 기업들의 경쟁이 워낙 치열하다 보니 지원 과제에 선정되는 것은 말 그대로 ‘하늘의 별 따기’ 수준이 됐다. 일단 어떻게든 자금을 유치하려는 생존 경쟁에 나섰기 때문이다. 심지어 소규모 바이오벤처가 지원하도록 만들어진 과제에도 중견 바이오 업체들이 뛰어드는 실정이다.
현재 지원 과제를 진행 중인 바이오 업체들도 올해 들어 줄어든 R&D 예산 이슈로 고민이 크다. 한 바이오벤처 대표는 “바이오 업체 대표들이 모이는 곳마다 R&D 예산 삭감 문제가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면서 “다행히 정부가 내년에는 다시 R&D 예산을 늘린다고 하는데 상황이 나아질지는 지켜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바이오 업체들이 대·중소 규모에 관계없이 너도나도 정부·기관 과제에 선정되기 위해 뛰어드는 것은 그만큼 자금 사정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간 국내 바이오 업계는 대내외 불확실성과 투자자 신뢰 하락 등으로 투자가 크게 위축됐다. 벤처캐피털 등 민간에서 유입되는 신규 투자는 물론이고 기존 투자분도 만기 이후 재투자가 되지 않고 끊기는 경우가 많다. 최근 몇 년간 국내 바이오 업계에 대한 투자가 크게 위축되면서 국가 및 기관 지원 과제에도 바이오벤처들이 대거 몰려드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한국벤처캐피탈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바이오·의료 업종에 신규 투자된 금액은 8844억 원으로 2022년 1조 1058억 원 대비 20% 급감했다. 국내 바이오 투자가 1조 원 이하를 기록한 것은 2018년 이후 5년 만이다.
정윤택 제약산업전략연구원장은 “정부 R&D 예산과 민간 자본 등 모든 자금이 단절돼 바이오벤처들의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다”며 “(심지어) 대형 업체들도 정부 R&D 과제를 따기 위해 뛰어들고 있어 최근에는 몇 십 대 1까지 경쟁률이 올라갔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정부도 R&D 과제에 대한 성과를 만들어야 하니까 준비된 기업들에만 기회를 주고 초기 기업에는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고 있으니 과감한 R&D를 할 수 없다”며 “이는 기회비용으로 이어져 향후 국가적인 바이오 경쟁력이 낙후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실제 올해 자금난 심화로 한국거래소에서 ‘감사 의견 거절’ 판정을 받은 바이오벤처는 셀리버리·카나리아바이오·엔케이맥스·뉴지랩파마·제넨바이오·제일바이오·웰바이오텍 등 9곳이나 된다. 주요 감사 의견 거절 사유는 계속기업 가정의 불확실성으로 재무 건전성이 악화돼 기업 경영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점이다. 특히 2018년 성장성 특례 1호로 코스닥에 입성한 셀리버리는 2년 연속 감사 의견 거절을 받았다.
바이오벤처들은 파이프라인 개발 중단이나 연구 인력 축소 등 고육지책을 강구하고 있지만 이로 인해 기업의 성장성은 더욱 위축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CG인바이츠는 임상 1상이 진행 중이던 골관절염 치료제 ‘CG-650’, 신경병성 통증 치료제 ‘CG-651’, 류머티즘 관절염 치료제 ‘CG-652’ 등의 개발을 중단했다. 파멥신은 핵심 파이프라인인 전이성 삼중음성 유방암 치료제 올린베시맙과 미국 머크(MSD)의 키트루다 병용 임상을 자진 취하했다. 제넨바이오는 사모펀드에 경영권이 넘어가면서 R&D총괄이 퇴사하는 등 핵심 연구자들이 대거 이탈했다. 관리종목 지정 유예 특례가 만료된 유틸렉스는 연구소를 총괄하던 주요 인력이 퇴사한 후 6개월 이상 채워지지 않고 있다. 유틸렉스 관계자는 “해당 인력이 퇴사한 것은 맞지만 이후 CGT사업부와 항체사업부 총괄하는 인력이 각각 충원 돼 R&D에 매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만 현재 바이오 업계의 위기 상황에 대해 전문가들은 생태계 발전을 위해 필요한 성장통이라고 지적한다. 바이오벤처에 대한 정보를 살피고 구체적인 데이터를 기반으로 파이프라인을 바라보는 바이오 투자의 내실이 갖춰지는 시기라는 분석이다. 이 같은 성장통을 거치며 ‘옥석 가리기’가 이뤄지는 과정으로 한 단계 도약할 것으로 내다봤다.
권소현 이노큐브 대표는 “현재 어려운 시기가 바이오 업계에 대한 성숙한 투자가 이뤄지는 계기라는 데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말했다. 김명기 LSK인베스트먼트 대표는 최근 “국내시장 침체로 바이오벤처들이 투자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투자자 관점에서 보면 지금이 오히려 한국 기업에 투자할 적기”라고 말했다. 황만순 한국투자파트너스 대표는 “국내 바이오 기업들이 조금 더 많이 준비하고 고민하고 느껴야 한다”며 “창업하고 상장하면 무조건 투자받는다가 아니라 더 많이 네트워킹하고 더 많이 성과를 내려고 노력하면서 목숨 걸고 경영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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