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병관리청이 여성 청소년에게만 지원하는 사람유두종바이러스(HPV) 백신 예방 접종을 내년부터 남성 청소년에 확대하는 방안을 추진한다.
27일 의료계에 따르면 질병관리청은 HPV 백신 대상을 남녀 청소년으로 확대하는 방안을 담은 내년도 예산안을 기획재정부에 제출하기로 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대선후보 시절 공약이었던 9가 HPV 백신인 ‘가다실9’을 국가 필수예방접종(NIP)에 포함시키는 방안이 유력하다. 다만 부처별 예산안이 제출되고 기재부 내부 심의를 거쳐 국회에 제출되는 만큼 실현 가능성은 여전히 미지수다. 질병청 관계자는 “작년 12월 ‘국가 예방접종 도입 우선순위 설정 및 중장기 계획 수립 연구’를 통해 도입 타당성이 확인된 인플루엔자 대상 확대, 고령층 폐렴구균(PCV13) 백신 도입, HPV 9가 백신 도입 및 대상 확대, 고령층 대상포진 백신 도입 등을 관련 부처와 지속적으로 협의해 추진해갈 예정”이라며 원론적인 답변을 내놨다.
주로 자궁경부암을 예방한다고 알려진 HPV 백신은 남성도 감염되는 항문암·두경부암·구인두암 등 HPV 감염으로 유발하는 암의 90% 이상을 예방할 수 있다. 경제협력기구(OECD) 가입 38개국 중 33개국이 남성 청소년에 대한 HPV 백신 접종을 지원한다. 이 중 28개국이 최신 HPV 백신인 가다실9을 도입했다. 성관계를 통해 HPV가 여자에게 전파되는 것을 막자는 취지다. 국내에서도 2016년 6월부터 만 12세 여성 청소년에게 HPV 백신 접종을 무료로 지원하고 있다. 여기에 윤 대통령이 대선후보 시절 ‘가다실9’의 접종 권장 나이인 여성 9∼45세, 남성 9∼26세에 무료 접종을 시행하겠다고 약속하며 NIP 확대에 대한 기대감이 한껏 높아졌다.
가장 큰 변수는 예산 확보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서울 의원급 의료기관에서 최신 HPV 백신인 ‘가다실9’의 1회 평균 접종가는 22만 원 상당으로 현재 NIP에 포함된 ‘가다실(4가)·서바릭스’보다 7만~8만 원 가량 비싸다. 9가 백신으로 전환해 2~3회 접종을 완료하려면 그만큼 차액 부담이 늘어나는데 접종 대상마저 확대하려니 정부 입장에서는 부담이 컸다. 국내 도입된지 9년 가까이 되도록 HPV 백신의 남성 청소년 접종이 요원한 이유다.
2018년 1차 연구에서 HPV 백신의 남성 청소년 접종은 비용효과성이 없다는 결과가 나온 것도 이러한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그런데 작년 말 국정과제로 추진 중인 HPV 백신 대상 확대 및 고령층 대상포진 백신 도입이 질병 부담, 비용 효과 측면에서 타당하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자 정부도 더이상 버틸 명분이 사라졌다. 정해진 예산 안에서 HPV 백신 접종의 혜택을 늘리기 위해 골머리를 앓던 질병청이 ‘2차 접종 무용론’을 들고 나온 것도 이 맘때였다. 남성 청소년을 무료 접종 대상에 포함하는 대신 총 2~3회 접종해야 할 HPV 백신을 1회만 지원하기 위해 “1회 접종만으로도 예방 효과가 충분하다”며 1차 접종만 국가가 지원하는 영국·호주 사례를 제시했다가 전문가들로부터 빈축을 산 것이다.
기재부 예산 마감까지 나흘 남짓 남겨놓은 가운데 의료계 일각에서는 의정 갈등 여파로 HPV 백신 도입 확대 논의가 충분히 이뤄지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질병청이 공개한 올해 예방접종전문위원회 회의록은 단 2건이다. 전문위 전원이 오프라인 모임을 가진 건 4월에 단 한 번 뿐이었는데, 회의록에는 HPV 백신이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전문가들의 목소리가 충분히 반영되지 못하는 바람에 예산이 깎일 경우 접종 횟수 제한이나 최신 백신 대신 가격이 싼 백신을 도입하는 등 생색내기 정책이 이뤄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보건정책전문가인 김수연 서울대학교 보건환경연구소 연구교수는 “전 세계적으로 남녀 모두 백신접종으로 HPV를 감소시키기 위한 노력이 활발하다. OECD 국가 중 4가로 여성 청소년만 지원하는 국가는 멕시코, 코스타리카, 한국이 유일하다”며 “저출산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떠오른 가운데 미래 세대의 보건향상을 위해서라도 최신 HPV 백신의 남녀 접종을 더 이상 미뤄선 안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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