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도쿄 가스미가세키(일본 관청가)를 대표하는 엘리트 공무원은 한 때 모든 일본인들에게 동경의 대상이었다. 일본 최고 명문인 도쿄대 법학부를 졸업한 뒤 국가공무원 종합직(옛 1종) 시험에 합격해 재무성에 입직하는 길은 관료사회인 일본에서 최고의 엘리트 코스로 꼽혔다. 재수, 삼수는 기본이고, 사법시험에 합격하고도 포기할 만큼 잘나가던 일본 공무원의 위상이 끝없이 추락하고 있다. 공무원에 대한 환상이 깨어진 것일까. 명문대 출신 지원자가 급속도로 줄어들고, 저연차 공무원들의 이탈도 가속화하면서 인재 확보에 비상이 걸렸다.
도쿄대 인재들의 변심…경쟁률 바닥에 ‘비상’
일본 공무원의 인기 하락은 하루 이틀 이야기가 아니다. 대표적으로 일본의 엘리트 산실인 도쿄대 출신의 공무원 지원자는 매년 감소해왔지만 최근 그 수가 눈에 띄게 줄고 있다. 지난 29일 일본 인사원 발표에 따르면 2024년 봄 국가공무원 종합직 시험 합격자 1953명 가운데 도쿄대 출신은 189명(9.7%)에 그쳤다. 일본 종합직 시험은 한국의 5급 국가공무원 공개경쟁채용 시험, 즉 옛 행정고시에 해당한다.
봄, 가을 일년에 두 차례 치러지는 종합직 시험에서 도쿄대 출신 합격자 비율은 공무원 시험 경쟁률을 가늠하는 바로미터다. 종합직 시험에서 도쿄대 합격자 비율은 연 평균 30%대를 유지해오다가 점점 감소해 지난해(9.5%)부터 10% 아래로 떨어졌다. 그 빈자리는 교토대(120명), 리쓰메이칸대(84명), 도호쿠대(73명) 대학 출신들로 채워지고 있다.
하지만 앞으로는 이마저도 쉽지 않을 전망이다. 도쿄대 출신 뿐만 아니라 다른 상위권 대학들의 유능한 인재들 역시 사기업으로 눈을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공무원의 인기 하락으로 올해 종합직 시험 경쟁률(7대 1)과 지원자(1만3599명) 모두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특히, 지원자 수는 10년 전과 비교하면 40% 가량 감소한 수준이다. 한 때 종합직 시험 경쟁률은 30대 1을 기록하기도 했다. 일반직과 행정직 공무원 경쟁률 역시 매년 감소하는 추세로 ‘공무원 기피’ 현상이 심화하고 있다.
‘블랙 가스미가세키’ 낙인…"임금 더 줘도 안 가" 2030 엑소더스
일본에서 공무원은 저임금에 고강도 노동에 시달리는 직군으로 대표된다. 일본에서 초과근무가 가장 많은 직종 중 하나가 가스미가세키에 있는 중앙부처 공무원이들다. 지난해 후생노동성이 발표한 일본 중앙부처 공무원의 잔업실태 조사에 따르면 월 80시간 이상 초과근무를 한 공무원이 1092명에 달했다. 평균 저녁 9시는 되어야 퇴근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업무상 질병인 ‘과로사(過勞死)’라는 개념이 일본어 '가로시(かろうし)'에서 유래됐을 정도다.
전직 후생노동성 출신 센쇼 야스히로가 쓴 베스트셀러 ‘블랙 가스미가세키’는 일본 공직 사회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책은 일본 관료 조직을 뜻하는 ‘가스미가세키’와 악덕 기업을 뜻하는 ‘블랙 기업’의 합성어로 공무원 조직을 ‘악덕 기업’에 비유하고 있다. 책 띠지에 적힌 ‘오전 7시에 일을 시작해 27시20분(다음날 오전 3시20분)까지 사무실에 머문다’는 글귀가 일본 공무원의 일상을 짐작케한다.
위기감을 느낀 정부도 업무 환경 개선에 나서고 있다. 지난해 일본 정부는 공무원의 급여를 대폭 인상하고, 선택적 주 3일 휴일제를 도입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개정안에 따르면 올해부터 행정직 공무원 급여는 전년에 비해 0.96% 인상됐다. 수치상으로는 미미해 보이지만 1994년 이후 29년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이다. 공무원 초봉도 33년 만에 1만 엔(약 9만 1000원) 인상했다. 매월 10일 넘게 재택근무를 하는 직원에게 지급하는 재택근무 수당이 신설되고, 2025년부터 주 3일 휴무도 가능해진다.
이런 노력에도 공무원 기피 현상은 갈수록 가속화되고 있다. 국가인사원에 따르면 중앙부처 재직 10년 미만의 종합직 퇴직자 수는 2018년 이후 100명 대를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임금 인상 정도로는 젊은 인재들을 붙잡아두기에 역부족이란 평가다. 카토 마사토시 간세이가쿠인대 경제학부 교수는 “현 상황이 계속될 경우 질적·양적 자원이 부족해져 국민의 안전한 삶을 저해하고 국가의 쇠퇴로 이어질 수 있다”며 “높은 공적 마인드로 인재를 확보한다는 사명감에 의지할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경고했다.
단적으로 지난해 후생노동성 조사한 근로자들의 연 5일 유급휴가 사용 정도를 파악하는 연차유급휴가 취득율이 62.1%로 나타났다. 일본에서 5일 연차를 모두 소진한 근로자가 60%를 넘어서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여전히 일본은 오래 앉아 있는 직원이 대우받는 세상이란 의미다.
사기업, 그 중에서도 라쿠텐으로 향하는 인재들
일본에서는 인기가 식어버린 공무원 대신 특정기업으로 인재가 몰리고 있다. 도쿄대학신문에 따르면 2023년 학부 졸업생을 기준으로 가장 많이 취업한 기업 1위는 라쿠텐 그룹이다. 대형은행과 5대 상사로 불리는 미쓰비시, 미쓰이, 시미토모, 이토추, 마누베니를 제치고 2021년(19명), 2022년(25명), 2023년(17명) 3년 연속 1위를 유지하고 있다.
라쿠텐의 인기 비결은 사내 공용어가 영어인 점이 가장 큰 것으로 나타났다. 대부분의 팀에 외국인 동료가 배치돼 모든 대화가 영어로 이루어져 글로벌 업무 환경에서 일할 수 있다는 점이 장점으로 부각되고 있다. 승진이 빠른 점도 도쿄대 출신들을 불러 모으는 이유로 꼽힌다. 4~5년차에 과장으로 승진한 뒤 10년차에 각 부서를 이끌면서 공무원이나 일반 기업보다 개인의 성장속도를 빠르게 가져갈 수 있다.
“평생직장은 없다”…최종목표는 외국계 컨설팅그룹
도쿄대 출신 라쿠텐 입사자들의 입사희망 1순위는 라쿠텐이 아닌 외국계 기업이다. 외국계 기업에 합격하지 못하면서 그 대안으로 업무환경이 비슷한 라쿠텐에 입사했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 액센츄어나 맥킨지앤컴퍼니, PwC컨설팅 같은 외국계 컨설팅업체로 이직하기 위해서 격무에 시달리더라도 하루 빨리 업무스킬을 키우고 싶다는 것이다. 단기간에 다양한 업무스킬을 키운 뒤 몸값을 높여 외국계 기업으로 이직하거나 편딩을 받아 창업시장에 뛰어들겠다는 게 이들의 최종 목표다.
젊은층을 중심으로 이직 열풍이 거세게 불면서 일본에서도 평생직장 개념도 점차 사라지는 분위기다. 지난 2월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은 일본 총무성 조사를 인용해 지난해 이직 희망자가 1000만 명에 달했다고 보도했다. 일본의 지난해 취업자는 6759만 명으로 취업자 6명 중 1명이 이직을 희망하고 있는 의미다. 일본의 종신고용 문화가 저물고, 저출산·고령화로 경제 활동 인구(15~64세)가 줄면서 인력 부족 현상이 장기화된 영향이 크다고 닛케이는 분석했다.
아예 창업을 선택하는 졸업생들도 증가했다. 도쿄대 졸업생들의 창업은 매년 평균 30~40개로 지난해 3월말 기준으로 총 526개 사로 집계됐다. 도쿄대신문 혼다 마이카 편집장은 현 세대의 특징을 ‘실력주의와 상승 지향’으로 정의했다. “연공서열, 종신고용이라는 쇼와 시대(1926~1989년)의 문화가 아니라 연령을 불문하고 능력을 평가받아 경력을 쌓을 수 있는 쪽이 매력적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편집자주> 우리는 하루의 많은 시간을 직장에서 보내고 ‘일의 기쁨과 실망’ 속에서 몸부림치곤 합니다. 그리고 이는 옆 나라와 옆의 옆 나라 직장인도 매한가지일 겁니다. 먹고 살기 위해선 결코 피할 수 없는 ‘일 하는 삶’에 대해 세계의 직장인들은 어떤 고민을 하고 있을까요. 앞으로 매주 일요일 ‘일당백(일요일엔 당신이 궁금한 100가지 일 이야기)’을 통해 이 시대를 살아가는 글로벌 미생들의 관심사를 다뤄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