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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운 작가는 왜 모든 걸 '갈아'버렸을까? [아트씽]

[류지연의 MMCA소장품 이야기(3)]

문명 발전·시대상 반영하는 미디어아트

인간·사물 모두가 "먼지로 되돌아간다"

갈고 갈아…생성·소멸·덧없음 일깨워

신기운 '진실에 접근하기_아톰', 2006년, 단채널 영상, 컬러, 사운드, 2분 21초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신기운의 작품 ‘진실에 접근하기’는 사물을 갈아서 가루로 만들어버리는 영상이 계속 재생되는 미디어 아트 경향의 작품이다. 미디어아트란 무엇인가? 20세기 이후 과학문명의 발달로 인하여 전통적인 회화, 조각, 공예에서 볼 수 없었던 다양한 신기술 매체를 재료로 삼는 경향의 작품을 일컫는다. 쉽게 말하면 전화, 영화, TV, 인터넷, 컴퓨터를 이용한 멀티미디어, 나아가 최근 AR(Augmented Reality·증강현실),VR(Virtual Reality·가상현실), XR(Extended Reality·확장현실)은 모두 미디어아트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작품의 상영방식의 변화는 지난 20여년 동안 과학기술의 발전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006년 이 작품이 처음 전시에 출품됐을 때는 외장하드나 DVD에 작품을 담아서 영상 소프트웨어가 탑재된 PC·모니터·영상을 반복재생하는 비디오데크·스피커·빔 프로젝트 등 여러 구동장치를 연결해 재생했다. 불과 2년 뒤인 2008년, 필자가 기획한 해외순회전시 ‘소유냐 존재냐’에서는 USB를 디빅스 플레이어에 연결하면 되었기에 모니터와 스피커만 필요하였다.

2024년 현재 이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에 파일상태로 소장돼 있는데 전시할 때마다 전시공간에 맞는 모니터(혹은 디스플레이)만 필요한, 아주 단출한 상태가 되었다. 미디어 아트는 현대문명의 발전을 그대로 담아내는 현대미술의 가장 대표적인 장르이므로 향후 기술의 발전에 따라 새로운 모습으로 보여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신기운 '진실에 접근하기_알람시계', 2006, 단채널 영상, 컬러, 사운드, 4분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그런데 작가는 온전한 사물을 굳이 왜 가루가 될 때까지 갈아버리는가? 작가는 대학원 재학 때 회화 수업에서 학생들과 벽돌이나 의자를 표현하는 이야기를 하던 중 기호학에서 의자를 그린 것, 의자를 글로 쓴 것, 의자를 실물로 가져다 놓은 것이라는 기술방식에서 영감을 받아서 의자의 분자 상태, 원자 상태로서 의자의 가루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떠올렸다고 한다. 처음에는 실험삼아 책과 워크맨 등을 직접 손으로 갈거나 가루를 수집하는 작업들을 진행했는데 3일 정도 지난 후 고된 노동을 대체할 만한 장비들을 찾게 됐고 어느덧 자신만의 그라인더 기계를 만들게 됐다. 그리고 2000년 구입했던 디지털 카메라에 탑재된 타임랩스 기능을 활용해 음반, 책, 시티폰 등 주변 일상 사물을 가는 장면을 동영상으로 촬영했다.

작가는 처음엔 가루만 모으는 걸로 시작했으나 점차 인간을 비롯한 모든 사물은 먼지로 되돌아간다는 사실을 깨닫고 보다 종교,문화,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고 작품에 담아내고자 했다. ‘색즉시공 공즉시생(色卽是空空卽是色)’이라는 불교의 교리처럼 이 작품 속에서 사물의 모든 구체적인 형체과 선명한 색감은 종국엔 모두 회색의 가루로 변하고 만다. 따라서 궁극적으로는 회색의 가루가 모든 것들의 진실이고 사실임을 제목을 통해서 드러내고 있으며, 사물이 갈리고 복원되는 생성과 소멸의 과정 역시 ‘모든 사물의 근원은 동일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작가가 대상을 선택하는 기준은 주로 그 시절을 대표한다고 생각한 사물들이었는데 동시에 작가가 갖고 싶어하는 물건이기도 했다. 시작은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 음반 CD'였고 그 후로 키보드, 마우스, 울트라맨 피규어, 동전, 아이팟, 스마트폰, 플레이 스테이션 등을 갈았다. 이러한 사물들은 현대사회의 대표적인 상징으로서 단지 수집, 소유의 목적 만이 아니라 소유하는 것과 실재하는 것의 덧없음, 무의미함을 일깨우는 것이기도 하다. 아톰이 만화상으로 탄생한 연도인 2006년을 고려해 제작된 ‘아톰’은 미래주의적인 동시에 세기말적인 저항적 태도의 이중적 의미를 담고 있는데 수집대상의 대표적인 아이템으로서 생명력이 없는 피규어에 마치 생명이 더해진 의미를 지니고 있다. ‘알람시계’는 시계를 갈지만 속뜻은 시간에 대한 표현이다. 우리 생활의 가장 중요한 존재이지만 붙잡을 수도 없고 거스를 수도 없는 시간의 의미를 보여주고자 했다.

이 시리즈가 제작된 2006년은 오늘날 세계를 주름잡고 있는 한국현대미술작가들이 드러나기 시작한 해이기도 하다. 1990년대 말 IMF 외환위기의 어두운 경험과 기억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20,30대 초중반 젊은 작가들은 2000년대 중반 이후 자신들의 새로운 꿈을 펼치기 시작했고 주제의식, 재료선정, 제작방식, 전시장소 등 여러 요소들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실험하여 세계미술계 속에서 한국미술을 본격적으로 알리기 시작했던 신호탄 같은 존재들이었다. 20대 말의 전도유망한 청년작가는 어느덧 40대 중반 중견작가이자 미술대학의 교수가 되어있는데 그는 이제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자기복제를 피하기 위해 10여년 동안 더 이상 ‘진실에 접근하기’시리즈를 제작하지는 않았으나 자동차, 비행기, 나아가 집 등을 통해 21세기 한국현대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려는 꿈을 갖고 있다. TV에서 거대한 항공기가 갑자기 사라지는 마술을 보았던 기억을 떠올린다면 신기운 작가가 새로운 목표를 실현할 수 있도록 응원하게 된다.

신기운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개최 중인 ‘사물은 어떤 꿈을 꾸는가’ 전시에 출품됐다.

신기운 : 1976년 출생으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과 조소과를 졸업하고 영국 골드스미스대학(Goldsmiths College) 석사를 졸업했다. 2005년 다음세대재단 미디어작가상, 2007년 중앙미술대전 대상, 2010년 영국 블룸버그, 뉴컨템퍼러리, 2012년 SIA 미디어아티스트 어워드를 수상하였고 현재 영남대학교 디자인미술대학 트랜스아트과에서 부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아트스페이스펄, 윌링앤딜링. 런던 디올드폴리스 스테이션, 싱가폴아트센터, 플랫폼 엘 등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백남준 ‘다다익선’ 복원작업에도 참여해 메타버스를 활용한 미디어아트의 미래확장성과 재생가능성에 대한 연구도 진행했다.

류지연 국립현대미술관 미술품수장센터운영과장


▶▶필자 류지연은 국립현대미술관 미술품수장센터운영과장이다. 1996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로 입사해 전시기획, 미술관교육, 소장품연구, 레지던시, 서울관·청주관 건립TF 등 미술관에 관한 거의 모든 분야를 섭렵하며 29년째 미술관을 지키고 있다. 영남대 미학·미술사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영국 에식스대학교(Essex University)에서 미술관학(Gallery Studies)을 공부했으며, 서울대에서 미술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화여대 겸임교수(2022~2023)를 비롯해 인천시립미술관·대구미술관 자문위원, 서울문화재단 전시 자문위원, 예술경영지원센터 원로작가 디지털 아카이브 자문위원, 성북문화원·대안공간 공간291 자문위원, 증도 태평염전 아티스트 레지던시 심사위원 등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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