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근대 상인 및 상행위에 대한 무시와 경멸은 한국(조선)만의 상황이 아니라 중국(명·청)과 일본(에도막부)도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런데 일본 에도시대인 18세기 초반에 등장한 이시다 바이간의 상인 윤리에는 분명 차별점이 보였다. 막스 베버가 서양 근대화의 원동력인 ‘자본주의 정신’을 기독교의 프로테스탄티즘으로 파악했다면 로버트 벨라는 그 일본 버전을 ‘이시다 가문의 심학(心學)’에서 찾았다.
1685년 10월 12일 교토 근교의 산간벽촌에서 태어난 이시다는 일본에서 화폐경제가 발달하고 소비가 활발해진 겐로쿠 시대(1688~1704년)에 교토의 포목상에서 43세까지 상업에 종사해 두각을 나타냈다. 장사를 하던 중에도 틈틈이 책을 읽으며 독학하던 이시다는 1727년에 돌연 장사를 그만두고 45세가 되는 1729년부터 고향 자택의 한 방을 교실로 삼아 무료로 강학 활동을 시작했다. 그의 제자 중에는 교토나 오사카에서 온 상인들이 많았고 1739년에 출간한 ‘도비문답(都鄙問答)’에는 ‘상인다움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시다의 답변이 담겨 있다. 그의 답변에는 검약·근면·정직·신뢰가 강조되는데 베버가 주목했던 프로테스탄티즘의 검약 및 근면과 상통한다.
그런데 이보다 더 혁신적인 이시다의 사상은 상인들의 이윤 획득이 결코 부끄럽거나 비천하지 않다는 선언이다. “상인은 금전 출납의 계산에 정통함으로써 나날의 생계를 꾸길 수 있기에…이러한 나날을 꾸준히 이어가며 부를 쌓는 것이 상인으로서의 바른 도리이다. …그리하여 부를 산과 같이 이루었다 하여도 그 행위를 탐욕이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상인이 ‘천하의 재화를 유통시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의 마음과 생활을 안정시키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의 사유는 책상 위의 철학이 아니라 상인으로서의 실천적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신선했으며 그의 사상을 학습한 상인들은 자신의 직업을 더 이상 부끄러워 않고 일상의 의미를 깨달아 검약에 힘쓰면서도 근면해져 더 많은 부를 획득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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