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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성에 가려진 추악한 '제국주의의 실체'

호추니엔, 아트선재센터에서 한국 첫 개인전

'호텔 아포리아' 등 제국주의 영상 상영

"제국주의의 파국, 익명화 할 수 없어"

싱가포르의 미디어 아티스트 호추니엔의 첫 번째 한국 개인전 ‘호텔 아포리아’ 전시 전경. 다다미가 깔린 6개의 방에서 일본 제국주의와 관련한 영상이 흘러 나온다. 사진 제공=아트선재센터




비행기가 이륙할 때 나는 굉음, 전쟁 중 군중을 선동하는 듯한 커다란 목소리. 광기 가득했던 1930~1940년대 일본과 독일의 모습을 담은 선전 영화 속 한 장면이 떠오를 만한 커다란 소음이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운 전시장에 울려 퍼진다.

천천히 팔을 뻗어 조심조심 소리를 따라 들어가자 빛이 보인다. 다다미가 깔린 여러 개의 작은 방에 설치된 스크린 속 영상에서 새어 나오는 빛이다. 영상은 제국주의 시대 일본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영상 속 인물들의 얼굴은 모두 흐릿하게 처리돼 형태를 알아볼 수 없다.

서울 율곡로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싱가포르의 미디어 아티스트 호추니엔(48)의 첫 번째 한국 개인전 ‘호텔 아포리아’의 모습이다. 국내에서 처음 공개된 ‘호텔 아포리아’는 여러 번 봐야 하는 전시다. 한 번 관람한 후 작품에 대해 잘 알아보고, 다시 한 번 긴 시간을 두고 천천히 관람할 때 비로소 작가의 이야기를 빠짐없이 이해할 수 있다.

싱가포르 작가 호추니엔. /연합뉴스


말레이시아계 화교 출신으로 싱가포르를 대표하는 작가이자 역사가인 호추니엔은 싱가포르가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처럼 일제 식민지 시기를 거쳤지만 비교적 제국주의에 대한 적대감이 덜하다는 사실을 포착하고 이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다. 2019년 일본 아이치트리엔날레에서 처음 공개된 ‘호텔 아포리아’는 제국주의에 대한 작가의 비판적 시선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아트선재센터에서 개막한 ‘호추니엔: 시간과 클라우드’ 전시에서 소개된 ‘호텔 아포리아’의 전시 모습. 영상 속 인물들은 얼굴이 지워진 채 등장한다. /연합뉴스




당시 일본 큐레이터는 작가에게 아이치현 도요타시에 있는 일본 전통 여관인 기라쿠테이에서 지역성이 잘 드러나는 작품을 제작해줄 것을 주문한다. 작업을 진행하던 작가는 기라쿠테이가 단순한 전통 여관이 아니라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가미카제 부대가 오키나와로 출발하기 전 마지막 연회를 열었던 장소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작가는 이 같은 사실에 착안해 태평양 전쟁 발발 직후 ‘문화정책’으로 확대된 일본 제국주의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작업을 진행한다.

당시 일본은 수많은 예술가들을 일본군의 선전에 동원했고, 이를 통해 전쟁을 정당화하고 참전을 독려했다. ‘호텔 아포리아’에는 선전에 동원된 예술가들의 작품이 소개된다. 그 중 한 명은 ‘후쿠짱’이라는 캐릭터로 잘 알려진 일본 만화가 요코야마 류이치(1909~2001). 그는 태평양 전쟁의 광기가 한창이던 1944년 최초의 해군 선전물 ‘후쿠짱의 잠수함’을 제작한 만화가다.

전쟁 중 만들어진 선전물은 가해국 일본과 피해국 국민들에게 전쟁을 정당화 하는 ‘가스라이팅’을 목적으로 한다. 작가는 명령에 이끌려 애니메이션을 제작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를 그저 해야 할 일을 한 직업인, ‘전쟁의 외부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영화감독 오즈 야스지로도 선전을 위해 징집된 예술인 중 한 명이다. 작가는 그의 영화 ‘만춘’을 편집해 보여주는데, 영상 속 인물들은 모두 얼굴이 없다. 그는 일본 제국주의에 관한 기억의 잔해라 할 수 있는 당시의 영상물 속 얼굴을 지움으로써, 제국주의의 파국을 익명화 할 게 아니라 언제나 지금 작동될 수 있는 투명한 현재의 시간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한다. 작가는 “빈 얼굴은 아무것도 아니면서 동시에 모두”라고 말한다.

호추니엔의 ‘호텔 아포리아’ 중 만화가 요코야마 유이치의 캐릭터 ‘후쿠짱’이 등장하는 선전 애니메이션의 모습. 사진 제공= 아트선재센터


현재 도쿄현대미술관에서 전시 중인 신작 ‘시간의 T’와 ‘타임피스’도 눈여겨볼 만하다. 관람객은 시간에 대한 43가지 이야기를 알고리즘에 따라 무작위로 감상할 수 있다. 각 작품은 ‘권력에 의해 맞춰지는 시간’이라는 하나의 주제를 담고 있다. 작가는 두 작품의 제작을 위해 동양과 서양의 시간에 대한 신화에서부터 근대 이전의 시간에 대한 인식과 시간을 계량화한 시계라는 기계 장치의 작동 원리 등을 총체적으로 연구했다. 전시를 기획한 아트선재센터는 “시간을 균질하게 전지구적으로 적용한 것은 근대 유럽인이고, 작가가 탐구하는 아시아와 근대성은 근대적 의미의 시간의 공간화에 의해 더욱 공고해졌다"고 설명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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