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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 상속세법, 이제 ‘실레노스의 상자’를 열자

■서정명 디지털 총괄부국장

시대 흐름 못 읽는 상속세법 바꿔야

기업 경영 옥죄는 멍에로 작용

경쟁국은 폐지하거나 세율 인하

중산층도 대상, '부자감세' 주장 모순





아테네의 정치가 알키비아데스가 스승 소크라테스를 찬양하면서 실레노스와 같다고 비유한다. 디오니소스의 술친구이자 대단한 지혜의 소유자인 실레노스는 보물 상자 한 개를 갖고 있었다. 겉모양은 낡고 초라했지만 그 안에는 인간의 머리를 초월하는 지혜와 뛰어난 재주, 결코 꺾이지 않는 용기 등 고귀한 가치들로 가득 차 있었다.

네덜란드의 인문학자 에라스무스는 1511년 저술한 ‘우신예찬’에서 이러한 교훈을 남긴다.

“모든 인간의 일은 알키비아데스가 얘기한 ‘실레노스의 상자’처럼 전혀 다른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네. 겉으로 드러난 얼굴에는 죽음이 보이지만 그 안쪽을 들여다보면 삶이 있다네. 실레노스 상자를 열어보시게. 겉으로 드러난 것과는 정반대의 무언가를 보게 될 것이네.”

밖에서 보이는 피상적인 사물이나 현상에 현혹되지 말고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보아야 한다는 경구다.

세계 최고 수준인 상속세 개편을 서둘러야 한다는 목소리가 거세다.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7월 말 세법개정안에 반영하겠다”며 “우리의 상속세 부담이 높은 수준인데 현행 제도가 20년 이상 개편되지 않아 합리적으로 손질해야 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며 불을 지폈다. 그동안 ‘부자감세 외식주의(外飾主義)’에 매몰돼 상속세 완화에 딴지를 걸었던 더불어민주당도 어느 정도 공감대를 보인다고 하니 이번 세법개정안에 전향적인 내용이 담기기를 기대해본다.

현행 상속세는 기업인들의 경영 활동에 고래 심줄보다 질긴 재갈을 물릴 뿐 아니라 중산층에도 세금 폭탄을 안기는 독소가 되고 있다.



우리나라 상속세 최고 세율은 50%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일본(55%)에 이어 2위다. 최대주주 할증과세(20%)를 포함하면 최고세율은 60%로 세계에서 가장 높다. 상속세 제도는 2000년 최고세율은 올리고 최고 과표 구간은 50억 원에서 30억 원으로 낮춘 후 24년째 유지되고 있다. 삼성·LG·SK 등 그룹 오너들이 수조 원에 달하는 상속세를 마련하기 위해 주식을 대거 처분하는 것이 현실이다. 상속세 부담 탓에 기업 최고경영자(CEO)와 대주주들이 주가 상승을 되레 꺼리면서 ‘코리아 디스카운트’ 요인이 되기도 한다. 국부를 늘리기는커녕 제 살을 깎아 먹는 애물단지가 됐다.

OECD 국가들은 일찌감치 상속세를 없애거나 세율을 내리고 있다. 캐나다·호주 등 OECD 15개국은 제도 자체를 아예 폐지했으며 미국은 55%에서 40%로 인하했다. 독일은 2000년 35%에서 30%로 내렸고 상속세를 처음 도입한 영국도 40%에서 20%로 대폭 낮추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세금 멍에’를 뒤집어쓴 한국 기업들에 글로벌 경쟁력을 가져야 한다고 채근하는 것은 ‘그물로 바람을 잡으라’고 요구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다.

중산층도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상속세에 거친 호흡을 토하고 있다. 지난해 상속세 과세 대상은 1만 9944명으로 2020년 1만 명을 넘어선 뒤 3년 만에 2배가량 급증했다. 이 기간 결정세액도 4조 9000억 원에서 12조 3000억 원으로 2배 이상 늘었다. 지난해 서울 아파트 평균 매매가격은 12억 원 수준인데 1997년 이후 한반도 바뀌지 않은 공제한도(10억 원)를 웃돈다. 집 한 채 가지고 있는 중산층도 상속세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1997년 이후 국민소득은 4배 이상 늘고 집값은 10배 이상 가파르게 뛴 현실을 상속세법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시대와 호흡하며 법을 만들어야 하는 위정자들의 무지이자 방임인 것이다.

김태년 민주당 의원은 지난주 반도체 산업에 100조 원 규모의 정책금융을 지원하고 투자세액 공제율을 높이는 반도체 특별법을 대표 발의했다. 시대의 맥을 짚는 통찰이자 국가 미래를 걱정하는 혜안이다. 고장 난 상속세법도 전향적인 사고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죽음을 앞둔 노인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애타게 ‘고도’를 기다린 것처럼 한국 경제는 또 다른 ‘고도’를 기다리고 있다. 이제 국회가 나설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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