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대 국회 시작과 동시에 일방적인 의사일정을 강행해온 야당이 ‘채상병특검법’을 결국 본회의에 올렸다. 야당의 입법 독주를 저지할 마땅한 대응책이 없는 여당은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로 맞대응하며 법안 표결 지연 작전에 돌입했다.
하지만 다수 의석을 차지한 야당이 24시간이 지난 후 필리버스터를 강제 종료할 수 있는 데다 사실상 정부·여당에서도 특검법에 대한 대통령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를 기정사실화하고 있어 22대 국회 시작부터 여야 간 무분별한 정쟁이 한층 더 격화하는 모습이다.
우원식 국회의장은 2일 오후 국회 본회의에 더불어민주당이 강행 처리를 추진하는 채상병특검법을 상정하기로 결정했다. 당초 대정부 질문을 위해 사흘간 소집된 본회의지만 법안도 함께 처리할 수 있다는 야당의 주장을 우 의장이 그대로 수용한 것이다. 민주당을 비롯한 야당은 지난달 21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국민의힘이 불참한 채 특검법을 ‘초고속’으로 통과시켰다. 박찬대 민주당 원내대표는 국회의장 주재로 추경호 국민의힘 원내대표와 회동한 후 “채 상병 (순직) 1주기는 7월 19일로 이번 6월 임시국회에 처리하지 않으면 그전에 처리가 사실상 어렵게 된다”며 6월 임시국회가 끝나는 이달 4일 이전에 채상병특검법을 통과시키겠다는 강한 의지를 내비쳤다.
국민의힘은 곧바로 필리버스터 준비에 들어갔다. 추 원내대표는 원내 대책 회의 이후 기자들과 만나 “대정부 질문을 하기 위해 열린 본회의에서 안건 상정을 한다는 건 여야 간 합의도 없고 민주당이 원하는 대로 국회의장이 함께 편승·동조해서 안건을 강행 처리하는 것”이라며 필리버스터 추진 필요성에 대해 강조했다. 국민의힘은 실력 행사에도 나섰다. 국민의힘 의원들은 본회의에 앞서 국회의장 집무실을 항의 방문하고 ‘국회의장 중립 의무 준수하라’ ‘의회주의 무시하는 편파 운영 중단하라’ 등이 적힌 플래카드를 흔들며 규탄의 목소리를 높였다.
이에 맞서 야당은 오는 4일께 ‘토론 종결권’을 활용해 필리버스터를 강제로 종료시키고 그 직후 표결을 강행할 계획이다. 국회법에 따르면 필리버스터 개시 후 24시간이 지나면 재적의원 5분의 3(180명) 이상의 찬성을 얻을 경우 토론을 끝낼 수 있다. 민주당(171석)에 조국혁신당(12석) 의석만으로도 토론 종결이 가능하다. 3일로 예정된 대정부 질문은 파행될 가능성이 크다.
사실 국민의힘으로서도 입법 강행을 막을 만한 뾰족한 수단이 없다. 따라서 법안 처리 과정의 부당성을 강조하는 데 의미를 둔 행보로 맞서는 상황이다. 국민의힘에 남은 카드는 윤석열 대통령에게 거부권 행사를 건의하는 것뿐이다. 전날 국회 운영위원회에 출석한 정진석 대통령실 비서실장도 채상병특검법에 대해 “위헌 소지가 있다고 판단되는 법안은 당연히 거부권을 행사해야 한다”며 거부권 행사가 불가피하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에 특검법이 본회의 문턱을 넘으면 윤 대통령은 15일 안에 거부권을 행사하고 야당은 곧바로 재표결에 들어갈 것으로 보인다. 이때 국민의힘 이탈표가 나오더라도 소수에 그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야당은 채상병특검법 상정에 앞서 진행된 정치·외교·통일·안보 분야 대정부 질문에서도 채 상병 수사 외압 의혹을 집중 추궁했다. 첫 번째 질의자로 나선 박범계 민주당 의원은 신원식 국방부 장관에게 “지난해 8월 21일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이종섭 전 장관과 통화한 적 있느냐는 질문에 전혀 없다고 하지 않았나. 왜 거짓말했냐”고 따져 물었다. 이에 신 장관은 “거짓말한 적 없다”며 “(채 상병 순직 사건 관련) 구체적인 것은 수사와 재판을 통해 사실관계와 책임자 처벌이 이뤄질 것”이라고 답했다. 다만 이날 우 의장은 민주당이 6월 임시국회 내 처리 방침을 정한 ‘방송 4법’은 상정하지 않았다.
한편 박희승 민주당 의원 등 71명 의원은 이날 ‘공공보건의료대학 설립·운영에 관한 법률안’을 발의했다. 졸업 후 의료 취약지의 의료기관 등에서 10년간 의무복무를 하도록 하는 것이 핵심이다. 그러나 공공의대는 의사 단체들이 거세게 반발해온 정책으로 의사들과 정부 사이의 갈등이 이번 입법을 계기로 ‘의사들과 정치권 전반’의 갈등으로 확산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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