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가 도산검림(刀山劍林)이다. 거대 야당이 해병대 채상병 특별검사법을 단독 상정한 데 이어 4일 본회의에서 밀어붙여 국회는 특검과 탄핵이 지배하고 있다. 여당이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라는 방패를 동원했지만 190명이 넘는 야당 의원 수에 간단히 무력화됐다. 윤석열 대통령을 잠재적 피의자로 여기며 야당이 겨눈 칼인 특검법을 용산이 받을 리 만무하다. 윤 대통령은 채상병 특검법이 넘어오면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할 것이고 야당은 재의결을 향해 부족한 8석을 채우려 여론전을 펼칠 것이다.
정치가 스스로 문제와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고 수사와 기소, 법원 판결에 의존하고 있는 ‘정치의 사법화’는 이제 여의도의 일상이다. 채상병 특검법만 해도 이미 야당이 지난해 발의해 21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에서 재의결마저 무산됐지만 다시 태풍의 눈이 돼 돌아왔다.
더불어민주당이 지난해 3월 발의한 김건희 여사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의혹 특검법과 대장동 개발 비리 50억 클럽 특검법, 소위 쌍특검법 역시 올 초 여의도를 휩쓸다 윤 대통령의 거부권을 만난 뒤 소멸했다. 야당은 김 여사의 명품백 수수 의혹을 추가해 특검법을 재차 발의했고 조국혁신당은 ‘한동훈 특검법’을 7월 국회에서 처리하겠다고 벼른다. 툭하면 터져나오는 야당발 특검법이나 국무위원 혹은 검사 탄핵 추진이 정국의 블랙홀이 돼 국민의 먹고사는 문제인 민생과 경제마저 집어 삼키는 형국이다.
민주당 등 야당 정치인들 역시 여의도에 특검만 횡행하는 정치의 사법화가 야기한 폐해들을 인정한다. 그러면서도 이재명 전 민주당 대표의 ‘사법 리스크’를 거론하며 특검 정국의 책임을 여권 심장부인 용산에 떠넘긴다. 여당이 이 전 대표가 대장동 개발 특혜, 대북 송금 등 7개 사건에 걸쳐 11개 혐의로 4개의 재판을 동시에 받는 것을 꼬집어 “단군 이래 가장 많은 비리 의혹을 받는 정치인”이라고 비난하는 것에서 보듯 “여의도가 서초동만 쳐다보게 한 것은 윤 대통령이 먼저”라고 주장한다.
이 전 대표가 재판을 받는 범죄 혐의들의 유·무죄 가능성을 떠나 여권의 최대 관심사가 현재 이 전 대표의 위증교사 의혹이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에 대해 하반기 중 나올 법원의 1심 판결 결과임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여권은 이 전 대표를 ‘여의도 대통령’이라고 부르면서도 중요한 정치적 파트너로 여기기보다는 법원의 단죄로 정치 생명이 끊길 날만을 기다리는 것이다. 여당이 이 전 대표의 검찰 수사 과정에서 6명이 숨을 거뒀다며 관련 특검이 필요하다고 나서자 민주당이 곧장 검찰의 ‘정적 탄압, 살인 수사’에 특검을 도입하자고 대응하는 것을 보면 정치의 사법화에 대한 책임을 여야 중 어느 쪽에 더 크게 물어야 할지 단언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칼만 품고 말과 협상은 없앤 정치 실종의 현 상황을 누가 바꿀 수 있는지 물으면 야당은 물론 여당 정치인의 답도 쉽게 일치한다. 그는 준사법권을 지닌 검찰을 통할하며 여당의 실질적 리더인 윤 대통령이다. 실제로 윤 대통령은 4월 이 전 대표에게 전화해 첫 영수회담을 제안하고 직접 만나 정치 복원의 첫 걸음을 먼저 내디딘 바 있다. 마침 윤 대통령은 2일 국무회의에서도 “대화와 합의를 통해 의사 결정을 이뤄내는 게 정치의 요체”라고 강조했다.
무엇보다 윤 대통령은 문재인 정부 시절 수많은 공격과 논란을 담대하게 이겨내며 칼로 정적을 제거하는 일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몸소 입증한 바 있다. 경찰 수사 등에 낙마한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나 검찰력이 총동원돼 2심까지 유죄 판결이 내려진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총선을 거쳐 정치적으로 부활한 것 또한 목격했다.
윤 대통령이 국가의 미래를 위해 심혈을 쏟고 있는 의료 개혁과 같은 과제는 여야 간 정치적 합의가 없이는 그 뜻이 아무리 숭고해도 성공하기 어렵다. 연금 개혁도 두말할 필요는 없다.
정치의 복원은 여야가 칼을 거두고, 대화와 협의로 최소한의 신뢰를 쌓고, 작은 합의도 이행하며 다시 ‘말의 시대’를 열 때 가능하다. 대화는 상대방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할 것이다. 법의 신 ‘디케의 칼’이 여의도에서 사라졌다는 믿음이 정치 복원의 열쇠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