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만 지체됐어도 수술을 아예 못 받을 뻔했다니까.”
해외 주재원 파견 중 부인과 종양이 발견돼 올해 초 급히 귀국했던 지인으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종양 크기가 심상치 않다는데 보험 적용이 가능한 현지 병원에서는 검사 일정을 잡는 것조차 하늘의 별 따기였다. 고민 끝에 일정을 앞당겨 돌아와 1월 말께 수술을 받았는데 최근 의료계 뉴스를 보니 천만다행으로 여겨진다는 얘기였다. 미국·유럽 등 국외에 거주하는 교포들이 잠시라도 한국을 방문했을 때 반드시 챙기는 일정이 병원 진료다. 해외에 나가 있으면 진료를 받는 데 몇 달을 대기해야 하거나 비용이 매우 많이 들기 때문이다. 소아과 오픈런, 응급실 뺑뺑이 등 위험 신호가 자주 감지됐다고는 하나 한국의 의료 시스템은 세계 어느 나라와 견줘도 손색이 없었다. 그런데 정부가 의대 정원 증원 정책을 내놓은 지 몇 달 만에 의료 현장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됐다. 이달 4일 집회에서 뇌종양이 시신경을 눌러 눈이 잘 보이지 않는데 기약 없이 수술이 미뤄졌다는 환자의 절규를 들으니 맥이 빠졌다.
의료 공백이 다섯 달째 이어지는 상황에서 211개 수련병원 전공의의 출근율은 8%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대로라면 하반기 인턴·레지던트 모집도 차질이 빚어질 가능성이 높다. 그동안 한국 의료를 이끌어온 대형 병원들이 줄도산할지 모른다는 우려감이 턱밑까지 찼는데 정치권에서는 ‘공공의대 설립’ 주장이 고개를 들었다. 박희승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 71명의 의원이 발의한 ‘공공보건의료대학 설립·운영에 관한 법률안’은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공공보건의료 인력을 양성할 대학·대학원을 설립해 운영하자는 게 핵심이다. 의대 졸업 후 의료 취약지의 의료기관 등에서 10년간 의무 복무를 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공공의대 설립은 의대 정원을 2000명 늘리겠다고 선언한 윤석열 정부조차 신중하게 접근하는 사안이다. 가뜩이나 의정 갈등이 출구를 찾지 못하는 상황에서 의료계가 의대 정원 확대 못지않게 반대하는 공공의대 법안을 발의한 것은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나 다름없다. 정당과 국회는 의정 갈등을 부추기는 것이 아니라 하루빨리 진료 공백을 정상화하는 데 온 힘을 쏟아야 한다. 싸움이 길어질수록 환자와 가족, 병원 근로자 등 국민들의 피해가 커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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