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가 천문학적 보조금과 규제 완화로 반도체 부흥에 속도를 내는 가운데 주요 반도체 기업들이 2029년까지 5조 엔(약 43조 원) 규모의 대대적인 투자에 나선다. 뉴욕 증시에서 엔비디아 등 인공지능(AI)과 반도체 관련 종목이 강세를 보인 데다 일본 주요 기업들의 2분기 실적 기대감까지 반영되며 일본 증시는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9일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이 소니그룹과 미쓰비시전기·키옥시아·롬·도시바·라피더스·르네사스일렉트로닉스·후지전기 등 반도체 기업 8곳의 설비투자 계획(2021~2029년 기준)을 분석한 결과 무려 5조 엔에 달했다. 소니그룹은 반도체 화상 센서 증산을 위해 2026년까지 1조 6000억 엔을 투입한다. 스마트폰 카메라 수요에 대응하는 한편 자율주행 관련 제품으로의 용도 확대에 대비해 지난해 나가사키에 이어 구마모토에 새 공장을 지을 계획이다.
AI용 데이터센터나 전기차(EV) 등의 시장 확대에 발맞춰 전력을 효율적으로 제어하는 파워 반도체 증산 투자도 잇따른다. 도시바와 롬은 지난해 제품 생산을 분담하는 방식으로 힘을 모으기로 하고 각각 이시카와, 미야자키현에서 가동할 새 공장에 총 3800억 엔을 투입하기로 했다. 미쓰비시전기 역시 파워 반도체 생산능력을 2026년까지 2022년의 5배로 증강할 계획을 세우고 구마모토 공장에 1000억 엔을 들여 새 건물을 건설한다.
이 같은 움직임은 ‘반도체 르네상스’를 기치로 내건 일본 정부의 적극적인 반도체 육성 정책과 궤를 같이한다. 일본의 반도체 산업은 1980년대 후반까지 세계시장에서 50%를 점유할 만큼 경쟁력을 자랑했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공격적인 투자와 개발에 나선 한국과 대만에 뒤처지더니 2017년에는 점유율이 10% 아래로 고꾸라졌다. 최근 미중 대립을 배경으로 반도체 공급망 구축이 경제안보 이슈로 부상하자 일본 정부는 반도체 육성에 사활을 걸고 나섰다. 일본 정부는 2021년 ‘반도체·디지털 산업 전략’을 수립한 뒤 3년간 3조 9000억 엔을 지원했고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기업인 대만 TSMC 공장을 구마모토에 유치했다. 또 ‘첨단 반도체 국산화’를 목표로 일본 정부와 대기업이 대거 출자한 라피더스 홋카이도 공장 건립에도 실탄을 제공했다. 반도체 산업 지원금(3조 9000억 엔)은 일본 국내총생산(GDP)의 0.71%에 해당한다. 미국(0.21%), 독일(0.41%)을 넘어서는 수치다. 자금 지원 외에 토지 용도 제한 완화와 용도 지정 변경 기간 축소(1년→4개월) 등 공장 신설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고 전략물자 생산 업체의 생산 비용에 대해 과감한 세제 혜택을 부여해 반도체 소재·부품 기업들의 국내 투자를 촉진했다.
정부 지원과 기업들의 투자가 선순환을 그리며 글로벌 협력도 늘어나는 추세다. 미국과 일본의 반도체 관련 기업 10곳은 차세대 반도체용 재료와 제조 기술 개발을 목표로 한 연합체 ‘US조인트’를 미국 실리콘밸리에 설립하기로 했다. US조인트는 반도체를 최종 제품으로 조립하는 후공정 등 기술을 개발해 구글·아마존 등 미국 정보기술(IT) 대기업 수요에 대응할 방침이다.
미국 증시가 기술주 중심의 강세를 보인 가운데 일본 대표 지수인 닛케이225평균지수 또한 훈풍을 이어받아 9일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일본 기업들의 반도체 투자 확대와 글로벌 협력 소식이 긍정적인 재료로 작용하며 도쿄일렉·디스코·레조낙 등 반도체 관련주들이 큰 폭으로 뛰었다. 반면 우리나라는 투자 세액공제 같은 소극적인 지원 방안조차도 여야 정쟁에 막혀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22대 국회에서 특별회계를 통해 국내 반도체 산업에 100조 원 규모의 정책금융을 지원하자는 안부터 산업통상자원부 산하에 국가반도체산업본부를 설치하자는 내용까지 관련 법안들이 쏟아지고 있지만 논의를 주도할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는 기관 업무보고나 현안 질의조차 시작하지 못한 상태다. 국회의 한 관계자는 “백가쟁명식 아이디어가 쏟아지고 있으나 아직 제대로 된 논의는 이뤄진 적 없다”며 “반도체 지원에 진심이라면 공통분모를 찾아내 통과시킬 것은 먼저 통과시켜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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