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이 통화정책의 방향 전환을 위한 ‘깜빡이’를 켰다. 한은은 11일 기준금리를 3.5%로 유지하며 지난해 2월 이후 12번 연속 동결을 결정했다. 역대 최장 기간 동결 기록이다. 원화 약세, 가계부채 급증과 집값 불안 등을 우려해 금리를 내리기 어려웠던 것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금융통화위원회는 물가 둔화에 대한 자신감을 보이면서 이번 통화 긴축기 들어 처음으로 “금리 인하 시기 검토”를 예고했다. 이창용 한은 총재는 “(이전 금통위가 열린) 5월에는 깜빡이를 켠 상황이 아니었지만 이제는 차선을 바꾸고 적절한 시기에 방향 전환을 할 준비를 하는 상황이 조성됐다”고 밝혔다.
이 총재는 “지금 시장에 형성된 금리 인하 기대는 다소 과도하다”며 조기 인하설에는 선을 그었다. 하지만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한은 목표치인 2%에 근접하고 있어 기준금리 인하는 시간문제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반도체를 중심으로 수출 실적이 개선되고 있지만 고금리 장기화로 인한 소비·투자 회복세의 부진이 금리 인하를 재촉하고 있다. 지난달에는 신규 취업자 수가 두 달째 10만 명을 밑돌았다. 시장에서는 미국이 경기 위축에 대응해 9월에 기준금리를 내리면 한은은 10~11월쯤 뒤따를 것으로 보고 있다. 문제는 금리 인하가 불붙은 부동산·금융 시장 불안에 기름을 끼얹을 수 있다는 점이다. 최근 원·달러 환율은 1400원에 육박하며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수준까지 높아졌다. 가계대출과 서울 아파트 가격은 거의 3년 만에 최대 상승 폭을 기록했다.
금융 당국은 금리 인하기를 앞두고 ‘빚투(빚 내서 투자)’ 열풍이 재연되지 않도록 선제적인 정책 역량을 총동원해야 한다. 경제 논리를 따르지 않고 정치적 압박에 밀려 금리를 섣불리 인하했다가는 자산 거품을 키워 더 큰 위기를 부를 수 있다. 정부는 우리 경제의 최대 리스크인 가계부채 관리에 만전을 기하고 충분한 주택 공급으로 집값 상승 심리를 꺾어야 한다. 또한 금리 인하에 따른 외환시장 불안, 가계부채 증가 등이 금융 시스템 리스크로 전이되지 않도록 관리·감독을 철저히 해야 할 것이다. 저성장 고착화 위기에서 벗어나려면 단기 부양책이 아니라 전략산업에 대한 전방위 지원과 규제 혁파, 구조 개혁 등을 통해 성장 잠재력을 확충하는 정공법을 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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