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1년까지 독일이라는 나라는 없었다. 독일은 시인의 염원 속에서만 존재했다. 39개의 영방국가로 분열된 땅에서 수많은 독일인이 통일에 헌신했다. 그림 형제가 방방곡곡의 민담과 설화를 채집해 문화적 동질감을 마련했다면 누군가는 수많은 물길을 하나로 묶어 정치적 통일을 이룩해야 했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그 주역이었다. 황제 빌헬름 1세는 프로이센의 수상 비스마르크를 신생 제국 수상으로 임명했다. 한 세기 전만 해도 프로이센이 독일을 통일할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 프로이센은 변방의 2류 국가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빈이나 뮌헨이 아닌 베를린이 마침내 통일 독일의 수도가 됐다. 이 대하드라마의 중심에 비스마르크가 있었다.
베를린 근방 쇤하우젠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비스마르크는 태생부터 보수적이었다. 하지만 완고한 보수주의자는 아니었다. 보수의 가치를 추구하면서도 민족 문제에 관한 한 시민 계급과 타협을 도모했다. ‘철혈재상’이라는 별명은 그의 정치 생애 중 한 측면에서만 타당했다. 그는 국익을 위해서라면 악마와도 타협할 준비가 돼 있던 정치가였다. 그는 토지 귀족 출신이었지만 집단적 계급 이익에만 매몰되지 않았다. 극좌파를 제외한 모든 집단에 손을 내밀었다. 덕분에 덴마크·오스트리아·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연승하면서 통일의 외교적 발판을 구축했고 내치에서도 세계 최초로 복지국가 모델을 실현했다.
프로이센 수상으로 28년, 제국 수상으로 20년간 재직하던 그는 제국주의를 꿈꾸는 젊은 황제 빌헬름 2세에 의해 해고됐다. 의욕만 앞선 오너의 오판 대가는 너무 컸다. 유능한 최고경영자(CEO)를 해임한 후 발생한 1차대전은 유럽 전체에 재앙을 초래했다. 비스마르크가 수상직에 계속 있었다면 유럽 역사는 어떻게 됐을까. 결과는 단언하기 어렵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의 사후 독일 전역에 1000개 이상의 기념물이 세워진 것을 통해 이 거인이 떠난 자리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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