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브라질 리우 올림픽. 남자 펜싱 에페 개인전 결승에 오른 20대 초반의 대한민국 선수가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 앉아 있다. 점수는 13대9, 넉 점 차로 벌어졌고 남은 시간은 3분. 2점만 보태면 헝가리의 노장 임레 게저의 승리다. 패색이 짙어 보이는 상황에서 사내는 주문을 외듯이 중얼거린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후, 할 수 있다.”
휴식을 끝내고 경기는 재개됐다. 14대10.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다. 젊은 선수가 내리 넉 점을 따내며 14대14 동점을 만들었고 마지막 칼날이 상대 선수의 머리를 찌른다. 15대14 역전승. 우리 모두가 기억하는 리우 올림픽 드라마의 주인공 펜싱 박상영 선수의 이야기다.
2024년 파리 올림픽이 종반으로 접어드는 지금 8년 전 올림픽 스타를 소환한 것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던 그의 도전과 현재 파리에서 펼쳐지고 있는 우리 선수들의 사투가 오버랩됐기 때문이다.
신유빈 선수의 탁구 개인전 8강전 중계를 보면서 천성이 ‘새가슴’인 필자는 채널을 몇 번이나 돌렸는지 모른다. 그러다 ‘마음을 다잡고’ 그의 투혼 넘치는 플레이를 응원하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떨까, 저 상황에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그런 용기를 낼 수 있을까’. 앞서 여자 10m 공기소총 결선에서 16세 반효진 선수의 금메달을 건 슛오프를 봐야만 했을 때도 그랬다. ‘내가 저 순간, 저렇게 담대할 수 있을까.’
유도 혼성 단체전 패자부활전에서 10분 가까이 뛰고 동메달 결정전에서도 서든 데스를 치렀던 안바울 선수. 독일팀과 3대3으로 비겨 마지막 룰렛으로 본인이 또 시합을 치러야 했을 때 ‘무조건 이기겠다’는 다짐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초인적인 힘으로 이겨 결국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남자 펜싱 사브르 단체전 결승 때 교체 출전해 생애 첫 올림픽 무대에 섰던, 그리고 내리 5점을 따내며 금메달의 주역이 된 도경동 선수에게는 이렇게 묻고 싶다. “그렇게 잘할 자신이 있었나. 그 거침없는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어리석은 질문에 선수들은 이렇게 답했다. 리우와 도쿄 올림픽 금메달에 이어 파리에서도 3관왕을 차지하며 세계 최고 궁사 자리에 오른 김우진은 “오늘까지는 즐기지만 내일부터는 과거가 되기 때문에 새로운 목표를 갖고 전진하겠다”며 그간의 여정을 보여줬다. 유도 최중량급 김민종 선수는 개인전 은메달이 아쉬워 마냥 눈물을 훔치며 “하늘을 완전히 감동시키기에는, 이 정도로는 부족한 것 같다”며 고개를 떨궜다. 비록 주 종목 25m 권총에서 메달을 놓쳤지만 10m 공기권총에서 은메달을 딴 후 세계적인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스타가 된 김예지는 “미친 사람처럼 훈련했다”고 말했다.
하늘을 감동시킬 만큼 피땀을 흘려야 하는 선수들 뒤에는 그들을 묵묵히 후원하는 ‘키다리 아저씨’와 같은 기업들이 있다. 올림픽 무대 위에 태극기가 오를 수 있도록 헌신하는 기업들의 지원이 있어야 선수들이 오로지 훈련에 집중하며 실전에서의 마지막 순간에도 파이팅을 외칠 수 있는 것이다. 더불어 선수의 노력과 기업의 지원이 최고의 시너지를 낼 수 있었던 비결은 단체 운영과 선수 선발의 공정함이다. 그래서 올림픽 무대를 처음 밟고도 양궁에서 금메달 세 개를 따낸 임시현이 탄생할 수 있었다.
폭염만큼이나 뜨거웠던 올림픽도 오는 주말이면 끝이 난다. 어쩌면 15일 동안 선수들을 응원하고 그들의 눈물에 공감했던 평범한 국민들의 일상은 경기장보다 더욱 치열하고 눈물겨울지 모른다. 그들의 팍팍한 삶 순간순간이 ‘매치포인트’와 ‘슛오프’ ‘서든 데스’에 몰린, 그런 때일 수 있다.
그런데 국가를 대표하는 선수들만큼이나 치열하게 살아가는 이들이 삶의 터전에서 벼랑 끝에 서 있을 때 누가 그들에게 포기하지 않을 용기를 불어넣어줄 수 있을까. 최선을 다하기만 하면 소박한 성취와 행복이 가능하도록 돕는 국민들의 키다리 아저씨 말이다.
그런 누군가가 이 땅에 있을까. 불행하게도 없어 보인다. 2024년 대한민국에서 국민들의 손을 잡아줄 정부와 정치는 잘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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