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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킹은 숫자" "형, 자신있게 하자"…당돌한 외침, 파리를 뒤집다 [올림픽]

■ Z세대가 만든 '파리의 기적'

"별것 아냐" "이까짓 거" 정신 지배

206개국 참가·시청자 수억 명 등

숫자에 억눌리지 않고 기량 발휘

"태극기 뽐내고파" 금빛 세리머니

'즐기는 올림픽'으로 패러다임 변화

여자 사격 금메달리스트인 반효진(왼쪽)과 오예진이 대표팀 동료들을 응원하며 포즈를 취했다. 샤토루=성형주 기자




펜싱 여자 사브르 단체전 결승에서 포인트를 따낸 뒤 포효하는 최세빈. 파리=성형주 기자


수영 스타 박태환(35)은 최연소 올림픽 대표(15세)로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 참가했다. 꿈으로 가득 찬 첫 올림픽이었지만 너무 짧고 잔인한 경험이었다. 자유형 400m 예선 때 출발 신호가 울리기도 전에 물속으로 뛰어든 것. 모두가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과 잘해야만 한다는 부담이 겹친 결과였다. 부정 출발로 실격한 박태환은 화장실에 숨어서 두 시간 동안 눈물을 쏟았다고 한다.

올림픽은 전통적으로 그런 시험대였다. 전 세계 수억 명의 시청자가 나를 보고 있다는 긴장감과 나라를 대표한다는 무거운 책임감, 그리고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뒤섞여 마음과 몸을 경직되게 만드는 크나큰 무대였다. 그래서 그 모든 것을 이기고 시상대 꼭대기에 선 선수는 자타 공인 시대와 국가의 영웅으로 대접받았다.

시대가 변한 만큼 올림픽에 대한 시선도 변한다. 12일(한국 시간) 끝난 제33회 파리 올림픽은 올림픽 패러다임의 전환을 선언할 만한 대회였다.



남자 태권도의 박태준(20)은 먼저 금메달을 딴 뒤 여자부 선배인 김유진의 훈련 파트너로 나서 이렇게 말했다. “누나, 올림픽 별것 아니니까 긴장하지 마.” 후배의 조언대로 떨지 않고 제 기량을 다 보여준 끝에 금메달을 목에 건 김유진(24)은 도복의 태극기를 가리키는 세리머니를 선보였다. “우리 태극기가 멋있어서 뽐내고 싶었다”는 설명. 국위 선양의 ‘쿨한’ 버전인 셈이다.

1896년 시작된 올림픽은 전 세계 화합과 평화의 제전이자 인간 한계를 시험하는 궁극의 무대로 흔히 알려져 있다. 하지만 올림픽이라는 이름을 빼면 사실 선수들에게는 여러 대회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상대하는 다른 나라 선수도 세계선수권 등 평소 국제 대회에서 마주하는 선수들과 다르지 않다. 물론 이런 인식으로 올림픽에 임하는 게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인데 2000년대생이 주류가 된 우리나라 선수들은 어렵지 않게, 올림픽 경기를 다른 여느 대회의 경기처럼 무겁지 않게 치렀다. 206개국 참가, 시청자 수 수억 명 등의 위압적인 숫자에 억눌리지 않았다.

여자 사격 금메달리스트 양지인(21)의 좌우명은 ‘어떻게든 되겠지, 미래의 내가 알아서 하겠지’다. 홈팀 프랑스 선수와 살 떨리는 슛오프까지 갔는데 그는 “응원받는 친구(프랑스 선수)는 저보다 두 배로 떨릴 테니까 저만 열심히 하려고 했다”고 돌아봤다. 1999년생인 펜싱 남자 대표팀의 도경동은 열 살 선배 구본길이 고개 숙이고 있을 때 “형, 자신 있게 하자”고 다그칠 정도로 당돌하다.

세계 랭킹 1위 등 톱랭커들을 눕히는 ‘언더독의 반란’이 많았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사격 여자 10m 공기권총 금메달 오예진(19)의 랭킹은 35위, 여자 10m 공기소총 금메달 반효진(17)의 랭킹은 16위였고 김유진은 24위였다. 김유진은 “랭킹은 숫자에 불과하다. ‘힘들게 여기까지 왔는데 이거 하나 못 하겠어’라고 생각하며 마인드 컨트롤했다”고 했다. 최세빈(24)은 펜싱 여자 사브르 개인전 16강에서 세계 1위 에무라 미사키(일본)를 격파했다. 이름값을 반영하지 않고 철저하게 원점에서 선수를 뽑는 양궁협회의 공정한 선발 시스템도 Z세대를 열광하게 했다.

김유겸 서울대 스포츠경영학 교수는 “인간 특성의 변화는 경쟁이라는 환경에서 뚜렷이 드러나기 마련인데 이번 올림픽에서는 어린 세대의 특성이 눈에 띄게 나타났다고 본다”며 “한편으로는 엘리트 체육에서 투자라는 요소가 얼마나 중요한지 각 종목의 성패를 통해 확실히 드러났다. 앞으로 스포츠 정책에 있어 시사점이 큰 대회였다”고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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