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적으로 맨발 걷기 열풍이 부는 가운데 지방자치단체마다 황톳길 관리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황톳길 하나 만드는 데 비용이 수억 원씩 들어가는 데다 침수·폭우 때마다 유실된 황토를 채워 넣느라 진땀을 빼고 있기 때문이다. 당장 시급한 현안이 아닌데도 옆 지자체를 의식하거나 민원에 등 떠밀려 추진되는 사업으로 전락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12일 행정안전부 자치법규시스템에 따르면 243개 광역·기초 지자체 가운데 68.7%인 167곳이 맨발 걷기 지원 조례를 운영 중이다. 지자체 10곳 중 7곳이 맨발 걷기 지원을 지자체장의 업무로 규정하고, 맨발 걷기 산책로 조성·관리에 주력하고 있다.
전북 전주시가 지난해 3월 맨발 걷기 활성화 조례를 시행한 뒤 전국적으로 ‘어싱(earthing·접지)’ 열풍이 불었다. 서울시는 물론 서울 25개 자치구 가운데 17개가 관련 조례를 제정할 정도로 맨발길 조성이 지자체 최우선 정책이 됐다.
애초 맨발 걷기 운동은 아스팔트에 익숙한 도시인에게 접지권을 보장하자는 취지로 시작됐지만 사업은 황톳길 조성 위주로 흘러갔다. 전철역과 백화점이 가까운 곳이 ‘역세권’ ‘백세권’으로 불리는 것처럼 황톳길이 동네 가치를 높이는 기반 시설로 인식되면서 “황톳길을 깔아달라”는 민원이 끊임없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서울 동작구는 1동 1황톳길 조성을 추진 중이고 영등포구는 황톳길을 7곳에서 2배로 확대할 예정이다. 마포구는 최근 추가경정예산 5억 원을 확보해 부엉이근린공원에 황톳길을 조성한다.
서로 맨발 걷기 명소 타이틀 경쟁을 펼치지만 사실 황톳길은 지자체의 골칫거리다. 황톳길을 추가로 조성할 때마다 수억 원의 예산이 필요한데 최근 세수가 줄어 사업비를 마련하기가 하늘에 별따기가 됐기 때문이다.
자연 흙을 퍼내고 그 자리에 황토를 채워 넣은 결과 폭우 때마다 황토가 유실되고 침수 피해도 끊이지 않는다. 담당 공무원이 눈이나 비가 올 때마다 황톳길을 비닐이나 방수포로 덮어두지만 비가 많이 오면 속수무책이다. 서울 서대문구 안산에 비닐하우스까지 설치됐지만 “450m 비닐하우스가 경관을 망친다”는 지적이 나왔다.
평상시 관리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수분이 증발돼 황토가 딱딱하게 굳어지면 맨발 접촉 시 부상의 위험이 커진다. 이를 막기 위해 담당 공무원이 갈퀴로 흙을 고르거나 소금을 뿌린다. 하지만 소금은 나무를 고사시키기 때문에 배수 장치도 따로 설치해야 한다. 이뿐만 아니라 반려동물의 배변 오염, 습진·무좀 등 피부병 질환을 막기 위해 주기적으로 소독을 하거나 황토를 갈아야 하는 번거로움도 있다.
이를 두고 시급한 현안이 아닌데도 민원 눈치를 보며 각 지자체가 전시 행정을 편다는 비판이 나온다. 지자체 부단체장을 지낸 한 고위 공무원은 “황톳길 하나 깔고 관리하는 데만 수억, 수십억 원이 들어간다”며 “황톳길이 산이나 하천 주변에 만들어지는 탓에 비가 내릴 때마다 쑥대밭, 난장판이 되는 걸 알면서도 사업을 계속한다”고 지적했다. 서울 자치구의 한 관계자는 “옆 동네에는 황톳길이 있는데 우리는 뭐 하고 있느냐며 민원을 넣는데 어쩌겠느냐”며 “사실 우리도 곤혹스럽다”고 토로했다.
맨발 걷기 취지를 살려 인위적인 황톳길 조성 대신 자연 흙길을 활용하도록 정책을 개선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박동창 맨발걷기국민운동본부 회장은 “있는 그대로의 숲길을 보존하면서 맨발 보행로를 넓히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며 “자연 흙길이 있는데도 시멘트 벽을 세우고 황토를 채워 넣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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