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어야 1시간, 짧으면 30분 정도를 교육 받고 의사 업무를 시킵니다. 환자들을 위해 의료현장에 남아있는 간호사들에게 왜 희생만을 강요합니까?"
탁영란 대한간호협회(간협) 회장은 20일 서울 중구에 위치한 협회 서울연수원에서 '의사집단 행동에 따른 의료현장 문제 간호사 법적 위협 2차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간호사들을 보호할 수 있는 법체계가 너무나 허술하고 미흡하다"며 "이러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라도 국회에서 간호법안이 반드시 제정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날 협회가 공개한 '간호사 업무 관련 시범사업 실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사업 참여 대상인 의료기관 385곳 중 151곳(39%)만 참여하고 있었다. 시범사업 대상임에도 참여하지 않는 병원이 61%에 달한다는 얘기다. 시범사업 참여 기관에서 일명 'PA 간호사'로 불리며 진료지원 업무를 수행하는 간호사는 1만3502명으로 집계됐다. 정부는 지난 2월 의대 증원 정책에 반발한 전공의들이 대거 사직한 데 따른 의료공백을 메우기 위해 간호사들이 숙련도에 따라 응급환자 약물 투여, 수술 보조 등 일부 의사의 업무를 대신할 수 있도록 하는 '간호사 업무 관련 시범사업'을 운영 중이다. 간협은 지난 6월 19일부터 7월 8일까지 의료법 제3조의3에 따른 종합병원과 전공의의 수련환경 개선 및 지위 향상을 위한 법률 제2조의2에 따른 수련병원 등 385개 의료기관을 대상으로 실태조사를 벌였다.
참여율이 저조한 것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제대로 된 교육 없이 간호사들을 의사 업무로 내모는 병원들이 적지 않다는 점이다. 협회에 따르면 임상간호사 10명 중 6명은 병원 측의 강요로 전공의 업무를 수행하면서도 관련 교육은 1시간 남짓 받은 것으로 조사됐다. 그 결과 현장 간호사들은 환자 안전사고 발생에 대한 두려움과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업무를 수행하느라 많은 심적 부담을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조사에 참여한 현장 간호사들은 “점점 더 일이 넘어오고 교육하지 않은 일을 시킨다”거나 “시범사업 과정에서 30분∼1시간 정도만 교육한 후 업무에 투입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 밖에도 “수련의의 업무를 대신하고 있는데 업무 범위도 명확하지 않다", "책임 소재가 불명확한 데다 업무에 대한 교육 프로그램도 따로 없어 수련의의 업무를 간호사가 간호사를 가르치는 상황”이라는 호소가 나왔다.
앞서 간협은 지난 2월에도 기자회견을 열고 의대 정원 증원 및 필수 의료 정책 패키지에 반대하는 전공의들이 병원을 떠나면서 이들의 업무를 대체하는 간호사들이 대리처방과 대리기록을 포함해 치료처치 및 검사와 수술 봉합 등의 불법진료에 내몰리고 있다고 밝혔다. 의료공백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현장에 투입조차 되지 않은 예비간호사들에게도 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몇몇 병원들이 경영난을 이유로 신규간호사 발령을 무기한 연기하는 탓이다. 상급종합병원에 채용됐으나 지금까지 발령이 무기한 연기된 신규간호사가 76%에 달하는 상황에서 대부분의 대형병원들은 내년 신규간호사 모집 계획마저 없는 것으로 조사됐다. 간호대학 4학년 재학 중인 예비간호사들이 점점 더 고용절벽에 내몰리고 있는 셈이다.
이는 현장의 인력난을 가중시키는 악순환으로 이어지고 있다. 간협이 국민건강보험공단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건강보험통계’ 자료를 재구성해 분석한 결과 최근 5년간(2019년∼2023년) 1분기 대비 2분기 근무 간호사 평균 증가율은 크게 감소했다. 의료기관 종별로 들여다보면 상급종합병원은 5년 평균 1334명이 증가했던 패턴을 벗어나 올해는 오히려 194명이 줄었다. 종합병원은 지난 5년 평균치보다 근무 간호사 수가 2046명 증가하는 데 그쳤다. 병원급 이상 전체 간호사 증가 인원도 5년 평균의 65% 수준에 머물렀다.
간협은 의정갈등과 같은 비상사태가 벌어질 때마다 현장간호사들이 번번이 피해를 입는 상황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간호법이 제정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탁 회장은 “정부 시범사업 지침에는 ‘근로기준법 준수’라고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지만 의사 파업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간호사들의 근무 환경은 날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며 “신규간호사들은 자신의 삶의 방향마저 잃어버린 채 불안해하고 있고, 졸업을 앞둔 예비간호사인 간호대학 4학년 학생들은 고용절벽에 내몰리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면서 “이제는 진료지원 업무를 담당하는 간호사 교육 지원과 함께 신규간호사와 예비간호사들에 대한 문제 해결을 위해 정부가 나서야 하며, 의료 공백 사태 이후 현장을 지키고 있는 간호사에 대한 적정한 보상체계도 마련되어야 한다”며 “더 이상 간호사에게 희생만을 강요받지 않고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국회에서 간호법안이 반드시 제정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부는 PA 간호사가 지난 2월 의대 증원 정책에 반발해 한꺼번에 병원을 빠져나간 전공의들의 공백을 메울 대안이라고 보고 PA 간호사 법제화 등을 담은 간호법 제정에 힘을 싣고 있다. 지난 21대 국회 때 야당 주도로 간호법이 추진됐던 것과 달리, 올해는 여야 모두 간호법 제정 필요성에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입법 가능성이 높아졌다. 집권 여당인 국민의힘과 제1 야당인 더불어민주당 원내 수석 부대표가 지난 13일 회동을 갖고 오는 28일 국회 본회의에서 간호법 등 '쟁점 없는 민생법안'을 신속히 통과시키기로 합의한 것도 이달 말 간호법이 국회를 통과할 것이란 전망에 무게를 싣는다. 다만 의사들은 간호법이 제정될 경우 의료인 간 업무범위 구분 등에 문제가 있다며 반대하는 입장이다. 임현택 대한의사협회(의협) 회장은 지난 19일 서울 용산구 의협회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민의힘이 간호사들로 하여금 의사 노릇을 하게 하는 PA를 (의료대란 사태의) 해결책이라고 내놓았다"며 "오는 22일까지 간호법 입법을 중단하지 않으면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정권 퇴진 운동에 나설 것"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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