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블룸버그통신이 ‘미국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경합주의 경제 현실(The Swing-State Economic Realities Shaping the US Election)’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다. 11월 대선에서 초박빙 승부가 점쳐지면서 경합주의 표심이 중요해졌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경합주 7곳의 인구는 6100만 명, 지난해 국내총생산(GDP)은 4조 4000억 달러로 독일과 맞먹는다. 그런데 개별 주를 떼어놓고 보면 사정이 복잡하다. 2019~2023년 7개 경합주의 실질GDP 성장률이 평균 4.2%였던 데 반해 펜실베이니아(0.9%), 위스콘신(-0.7%) 등은 처참한 수준이다. 경합주 안에서도 유독 부침이 심했던 개별 카운티의 속사정은 미국 서민들의 고단한 삶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가령 펜실베이니아의 이리카운티는 2022년 말 경제성장률이 4년 전에 비해 -3.2%를 기록했다. 인구는 2012년 이후 계속 줄었으며 제조업 일자리의 10%가 사라졌다.
성장률 5.5%로 상대적으로 양호한 네바다는 다른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조 바이든 정부의 제조업 부흥에 힘입은 네바다의 와슈카운티는 첨단 제조 거점으로 거듭났고 고소득 근로자들이 대거 유입됐다. 이게 문제였다. 주택은 부족해졌고 집값은 치솟았으며 주민들은 대출금을 갚느라 허덕대고 있다. 5년 전 모기지 상환에 수입의 20%를 썼다면 지난해에는 수입의 37%를 대출금을 갚는 데 써야 했다.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고금리 정책을 편 여파다. 2021년 초 2.65%였던 30년 고정 모기지 금리는 지난해 10월 7.79%로 뛰었다. 물가 역시 심각한 수준이다. 바이든 정부 들어 물가 상승률은 연평균 5.7%에 달했는데 도널드 트럼프 정부(1.9%) 때의 3배다. 미국 유권자 3분의 1이 올 대선에서 ‘경제’를 중요한 판단 지표로 꼽는 이유다.
사실 어느 나라나 경제가 좋을 때보다 나쁠 때가 많다. 영리한 정치인은 선거 국면에서 이러한 틈새를 파고들어 유권자의 마음을 낚아챈다. 1993~2000년 미국을 이끈 제42대 대통령 빌 클린턴이 대표적이다. 1991년 미국 경제는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고 물가는 4.2%까지 치솟았다. 마그마처럼 응축된 대중의 분노를 포착한 클린턴 캠프는 1992년 대선 당시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It’s the economy, Stupid)’를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걸프전 승리로 89% 지지율을 기록했던 조지 H W 부시 대통령에 맞선 정치 신인 ‘아칸소 촌뜨기’의 승부수였다. 클린턴은 집권 첫해인 1993년 1.5% 수준의 성장률로 시작했지만 1기 평균 성장률은 3.3%를 기록했다. 경제 성과는 재선 도전에 든든한 자산이 됐다.
대선을 앞두고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과 트럼프 전 대통령도 앞다퉈 경제 공약을 쏟아내고 있다. ‘팁 면세’를 비롯해 식료품 바가지 단속, 수입품 20% 관세 부과 등 공약 경쟁이 뜨겁다. 대규모 선심성 공약도 등장했다. 해리스는 중산층 가정의 자녀 세액공제를 1명당 현행 2000달러에서 3600달러로 늘리고 첫 주택 구매자를 위해 2만 5000달러의 보조금을 제공하겠다고 한다. 트럼프는 사회보장기금 세금을 없애고 내년 종료 예정인 개인소득세 감면 시한 연장을 약속했다. 문제는 재원 마련 방안 없이 나온 포퓰리즘이라는 점이다. 미 ‘책임있는연방예산위원회(CRFB)’는 해리스와 트럼프의 해당 공약이 각각 향후 10년간 1조 7000억 달러(약 2300조 원), 1조 6000억 달러(약 2167조 원)의 재정적자를 가져올 것으로 우려했다. 이미 미국의 국가 부채는 35조 달러(약 4경 7400조 원)를 넘었다. 두 후보의 공약에 “수조 달러의 가격표가 붙어 있다”는 비아냥(월스트리트저널)이 나오는 배경이다. ‘문제는 경제’라며 경제 이슈를 내세웠지만 정작 나라 살림(국가 경제)을 망치는 ‘자해적 발상’이라는 비판도 따갑다.
미국 정치권에서 쏟아지는 포퓰리즘 공약은 ‘전 국민 25만 원 지원법’을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이는 여의도 풍경과도 겹치며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올 상반기 세수 펑크가 10조 원을 넘었는데 13조 원을 일회성 소비에 투입하겠다는 발상이 제1야당 대표의 총선 대표 공약이다.
철학자 한스 요나스는 “정권은 국민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한 필요조건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돼서는 안 된다”고 일갈했다. 국민의 삶을 책임지겠다는 정권 창출이 외려 나라 살림을 거덜 내고 국민의 미래마저 저당 잡힌다면 정치가 아니라 ‘폭주’다.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는 슬로건이 32년이 지난 우리 시대에도 유효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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