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이 ‘경증’이라고 생각하면서 119구급차를 타고 응급실을 찾는 환자가 과연 몇 명이나 될까요? 뚜렷한 대안 없이 진찰료를 올린다고 수십 년 간 이어져 온 응급실 과밀화 문제가 해결되겠습니까.”
이형민(사진) 대한응급의학의사회 회장(일산백병원 응급의학과 교수)은 25일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정부가 내놓은 의료개혁방안은 방향을 잘못 잡았다”고 쓴 소리를 했다. 의대 정원 증원에 반대하는 전공의들의 집단 사직에 따른 의료 공백이 반년 넘게 이어지면서 전국 곳곳의 대형 병원들은 응급실 운영에 차질을 빚고 있다.
이 회장은 “수련병원에 근무하고 있던 응급의학과 전문의가 약 800명, 응급의학과 전공의들은 500명 정도였다. 1300명 중 500명이 빠졌으니 정상적으로 운영될 리가 없지 않느냐”며 한숨을 내쉬었다. 남아있던 전문의들마저 ‘번아웃’으로 하나둘 병원을 떠나고 있는 와중에 코로나19 재확산까지 본격화하고 있다. 평소보다 환자가 몰리는 추석 연휴를 앞둔 응급의료 현장은 그야말로 벼랑 끝 상황이다.
2001년 전공의 수련을 시작해 줄곧 응급의학과 전문의 생활을 이이어온 이 회장은 “근 20년간 힘들지 않았던 적은 없었다”고 밝혔다. 원가에도 못 미치는 저수가, 불가항력적 의료 소송 부담 등 왜곡된 의료 시스템 안에서 근근이 버틸 수 있었던 것은 필수의료의 자부심 때문이었다. 그는 “저뿐만 아니라 이른바 ‘바이탈과(내과·외과·산부인과·소아청소년과·응급의학과 등)’ 의사라면 비슷할 것”이라며 “환자와 의료진이 신뢰할 수 있는 진료 환경과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이 조성되지 않는다면 정부가 말하는 의료개혁은 이뤄질 수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경증 환자들이 대형 병원 응급실로 몰려 정작 중증 환자를 치료하지 못하는 응급실 과밀화 현상은 국내 응급의료체계의 고질적인 문제다. 보건복지부가 응급실의 80%가량이 비응급 환자로 채워지는 불합리한 점을 바로잡겠다며 일반 환자가 대형병원 응급실을 이용하면 최고 3만 원까지 응급실 이용료(응급의료관리료)를 추가로 내도록 조치한 게 2000년이었다. 문제는 늦은 밤 응급실을 찾는 환자들은 대부분 스스로 자신이 중증인지 경증인지 판단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응급과 비응급의 경계에 애매하게 걸쳐 있거나 달리 갈 곳이 없어 응급실에 오는 환자도 적지 않다. 경증·비응급 환자의 응급실 진찰료를 올리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얘기다.
이 회장은 “20년 전에 실패했던 정책을 재탕, 삼탕하는 정부를 신뢰할 수 있겠나. 진짜 의료개혁을 하겠다는 의지가 있는 건지 의심스럽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예를 들어 대형 병원 응급실의 절반 가량을 차지하는 경증·비응급 환자 비중을 낮추는 게 의료개혁의 목적이라면 심야시간대 진료를 받을 수 있는 일차의료 시스템이 필요하다. 그런데 현 정부가 연일 쏟아내는 의료개혁방안에는 정작 그 목표가 빠져있다. 그는 “응급실은 원래 누구나 쉽게 올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잘못된 시스템을 만들어 놓고 무작정 경증 환자는 오지 말라고 하니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들이 떠안아야 하는 상황”이라며 “근시안적 정책으로는 벼랑 끝에 몰린 응급의료 현장을 회복시킬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흔들리지 않는 의료개혁이 가능하려면 실무 역할을 담당할 컨트롤타워가 필요하다고 봤다. 현재 국립중앙의료원 산하에 있는 중앙응급의료센터를 중앙의료청(가칭) 등 독립된 기관으로 승격시키는 것도 대안이다. 그는 “당장 눈앞에 닥친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10년, 20년 앞을 내다보는 의료정책이 마련돼야 한다”며 “시간이 많지 않다. 더 늦기 전에 현장 의료진들의 의견에 귀 기울여달라”고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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