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개발(R&D)이란 걸 어떻게 주 52시간에 맞춰 하겠습니까. 국가 경쟁력과 관계되는 기관들은 52시간 규제에서 제외할 필요가 있습니다.”
“올 초에 저희 연구원에 노동청 근로감독관이 와서 3년간 전 직원 출퇴근 시간표를 가져갔습니다. 가뜩이나 우수 인재들이 떠나고 있는데 남몰래 연구해야 할 판입니다.”
지난 23일 국회에서는 과학기술방송통신위원회 소속 최수진 국민의힘 의원이 주최한 정부 출연연구기관 연속 간담회가 열렸다. 이날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등 11개 출연연 원장들은 주 52시간제로 인한 연구 활동 제약과 성과 악화를 호소했다. 출연연 연구자들은 2019년 7월부터 일률적으로 주 52시간 상한제 적용을 받고 있다.
28일 정치권에 따르면 바이오 기업 대표를 지낸 최수진 의원이 근로소득 상위 5% 이내의 전문·관리직에 대해 주 52시간제 적용을 제외하는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발의하기로 했다. 2022년 기준 근로소득 상위 5%는 약 1억 1000만 원 이상의 연봉자가 해당된다. 주 52시간제는 생산직 근로자에게 적합하고, 고액 연봉을 받는 연구원의 경우 노동 시간보다 일의 성과가 중요하다는 취지다.
최 의원은 “반도체·바이오·양자 업계 등 한국이 세계 최고를 유지하고 있는 분야가 위협받고 있는 상황" 이라며 “업계나 연구 현장에서 주 52시간 규제를 적절히 걷어내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고 강조했다. 그는 “기술 개발은 시간 제한을 갖고 이뤄낼 수는 없다"며 “임금도 충분히 주고, 일할 때는 일하고, 쉴 때는 확실히 쉬는 문화를 만들자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국민의힘과 대통령실은 21대에 이어 22대 국회에서도 주 52시간제 유연화에 대한 법 개정 의지를 드러내왔다. 추경호 원내대표는 지난 6월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열린 중소기업인과의 대화에서 "각 기업 상황이 다르고 업종별로도 52시간을 지키되 유연하게 적용할 수 있는 근로시간 유연화가 필요하다"며 "국민의힘이 앞장서 법 개정을 추진하겠다는 말씀을 드린다"고 말했다. 다만 거대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 반대 입장을 고수하고 있어 법안 처리로 이어지기까진 난항이 예상된다.
그간 부가가치가 가장 높은 R&D 분야에서는 경직적 주 52시간 근로제로 기술 혁신 속도가 더뎌지고 있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됐다. 실제 국가과학기술연구회(NST) 산하 출연연 25곳 중 상당수가 주 52시간제 시행 이전인 2017년과 비교해 2022년 특허등록과 기술이전, 논문 게재 등 주요 실적이 줄줄이 하락했다는 조사가 발표되기도 했다. 한 연구원은 “R&D 직무에서는 특정 프로젝트 기간에 고강도 근무를 하고 초과근무 시간을 몰아 휴가로 가는 등의 방식이 효율적”이라고 말했다.
치열해지는 글로벌 기술경쟁 속 획일적인 주 52시간제 적용은 족쇄라는 비판의 목소리는 확산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이미 1939년부터 일정 수준 이상 고소득 근로자에게는 근로시간 제도 적용을 제외하는 '화이트칼라 이그젬션(White Collar Exemption)'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일본도 2019년 연간 수입 1075만엔(약 9900만원) 이상 수입을 가진 전문직을 근로시간 규제 대상에서 예외로 인정하는 '고도 프로페셔널 제도'를 도입했다.
기업인 출신의 한 여권 관계자는 “우리나라는 우수 R&D 인력들이 많은데 주 52시간 규제로 잘 활용을 못하는 신세” 라며 “이런 시급한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반도체·바이오·인공지능(AI) 등 핵심 기술분야의 국제 경쟁에서 낙오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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