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롬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을 ‘비둘기’로 만든 고용 한파는 이제 신입 직장인들의 악화된 임금 조건을 통해 현실화하고 있다. 아마존에서 8년간 재직하다 지난해 해고된 케이트 볼(44)은 최근 업계 동료들의 전화를 받으며 이같은 현실을 체감하고 있다. 볼씨가 아마존에서 맡았던 채용 직무를 담당하는 후임들은 당시 그와 비교해 65% 적은 월급을 받으며 같은 일을 하고 있다. 달라진 고용 시장 분위기에 영향을 받는 것은 비단 사회 초년생들뿐만은 아니다. 볼씨와 함께 해고됐던 동료들 중 일부는 아마존에서 더 낮은 급여 조건으로 계약직 업무를 하고 있다. 그는 “(동료들 중) 이전과 같은 급여·복지 조건을 유지한 이는 없다”고 말했다.
사무직·생산직 불문…최대 ‘반 토막’ 깎인 신입 급여
미국 구인·구직 플랫폼 집리크루터에 따르면 지난해 사무직 신규 채용자들의 급여가 줄어든 데 이어 최근 건설·제조·식품 등을 비롯한 생산직 신규 채용자들의 급여가 감소하고 있다. 구직자들이 기대하는 급여 조건도 크게 꺾었다. 1년 전만 하더라도 17만 5000달러~20만 달러(약 2억 3432만 원~2억 6780만 원) 수준에서 형성됐던 많은 일자리들이 이제는 수만 달러가 깎인 채로 공고되고 있다. 기업과 채용 담당자 역시 이러한 분위기 변화를 인정하고 있다. WSJ는 업계를 인용해 “고용주들은 최근까지만 해도 일할 사람을 채우는 데 어려움을 겪었던 시간제 근무직은 물론 전문직들까지 1년 전과 비교하면 훨씬 더 낮은 임금으로 공고하고 있다”고 전했다.
고용 시장이 빠르게 냉각되면서 필요한 인력과 급여 수준에 대한 결정권이 구직자에게서 고용주로 넘어갔다는 분석이 나온다. 에릭 준데프(31)는 고객경험 부문에서 구직 활동에 나선 지 9개월이 지났지만 일자리를 찾지 못했다. 준데프씨는 “많은 기업들은 우리 구직자들이 절박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 저렴한 월급을 지불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어졌다”고 토로했다. 그는 구직 활동을 시작한 이후 연봉 기대치를 최소 2만 달러 낮췄다.
신입들의 급여 조건은 직군을 가리지 않고 악화하고 있다. 집리크루터가 2만 개 이상의 직군을 조사한 결과 소매업·농업·운송업·제조업·식품업 등을 포함한 다양한 부문의 평균 급여(신규 채용 기준)가 1년 전보다 모두 하락했다. 급여 조건이 가장 크게 깎인 부문은 소매업으로 55.9%(반 토막) 하락했다. 이어 농업은 24.5%, 제조업은 17.3%가량 줄었다. 가장 유망한 직군이 모여있는 것으로 평가되는 실리콘밸리 역시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업계 채용 담당자들에 따르면 인공지능(AI) 기술이 필요한 일부 기술직들은 여전히 높은 급여 조건을 제공하지만 다른 대부분의 기술직들의 급여 조건은 2년 전보다 악화됐다. 30만 개 이상의 중소기업을 고객으로 둔 급여·복지 소프트웨어 업체 구스토에 따르면 신규 채용 급여가 감소하는 사무직 직군에는 금융(-9.2%), 보험(-1.6%), 기타 전문 서비스(-2.4%)도 포함됐다.
英 임금 상승률 2년만 최저…금융업계도 급여 인상폭·보너스 잇따라 낮춰
미국만이 아니다. 글로벌' 빅4' 회계법인 중 한 곳인 EY는 영국 내 수천 명의 직원들의 급여 인상폭을 낮추고 보너스를 줄이고 세무 부서의 인력을 감축하는 등 조치에 나섰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정통한 소식통을 인용해 EY가 세무 자문 부문에 속한 4400명의 직원들을 대상으로 올해 기본급 인상률을 2.2%로 통보했다고 전했다. 지난해(6%), 2022년(10%)와 비교하면 대폭 깎인 수준이다. 경쟁사인 PwC 역시 지난달 영국 대부분 직원들을 대상으로 3%의 급여 인상폭을 공지했다.
영국의 임금 상승률은 올해 2분기 2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을 기록했다. 이 기간 기본급 상승률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5.4% 상승했는데 이는 직전인 1분기(5.8%)보다 둔화한 수치다. 영국 중앙은행인 영란은행(BOE)가 주목하는 민간 부문 임금 상승률도 같은 기간 5.2%로 직전 분기(5.6%)보다 떨어졌다. 모니카 조지 마이클 국립경제사회연구소 이코노미스트는 “빈자리에 비해 실업률이 상대적으로 증가하는 등 고용 시장이 냉각되면서 임금 (상승) 압력을 앞으로 몇 달 동안 점진적으로 하락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BOE는 이달 초 기준금리를 연 5.25%에서 5.00%로 인하했다.
고용주는 인건비 시름…원격 근무 선호·해외 이전도 고려
고용주에 따르면 신규 채용자들의 임금 하락은 늘어난 비용 압박에 따른 불가피한 조치다. 오하이오·펜실베이니아·웨스트버지니아에서 맥도날드 매장 56곳을 운영하는 가맹점주는 직원들에게 시간당 13달러를 지급하고 있지만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동안 제시했던 ‘사이닝 보너스’(인력 채용시 지급하는 일회성 인센티브)와 다른 장려금들은 없앴다. 그는 매니저들에게 시급을 12달러로 낮출 수 있는지를 계속 묻고 있다. 점주는 “맥도날드 매장의 인건비가 내 식비를 초과한다”며 “24년간 이런 일은 처음”이라고 토로했다. 그는 이어 “모든 이들이 미국에서 잘 되기를 바라지만 비용 압박은 어쩔 수 없다”고 덧붙였다.
일부 고용주들 사이에서는 인건비를 낮추기 위해 원격 근무를 선호하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원격 근무 채용 공고는 정점을 찍었던 2022년보다는 줄었지만 여전히 코로나19 팬데믹 이전보다 높은 수준을 보이고 있다. 줄리아 폴락 집리크루터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급여를 삭감하려는 고용주들은 (일부 일자리) 지원자들이 원격 근무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더 적은 돈을 받을 준비가 돼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고용주들은 직원들에게 유연성(원격 근무)을 제공할 때 임금 상승에 대한 압박을 덜 느끼며, 실제로 원격 근무의 가치가 8~10%의 임금 인상과 동일하다고 보는 것으로 분석된다.
인건비 절약을 위해 사업 지역을 더 저렴한 지역이나 해외로 이전하는 고용주들도 늘고 있다. 브룩 웨들 맥킨지그룹 수석 파트너는 “기업들이 비용을 줄이기 위해 미국에서 데이터 분석가를 고용하는 대신 비교적 인건비가 저렴한 멕시코와 폴란드에서 직원을 구하려고 한다”며 “지리적 차익 거래는 진짜”라고 말했다. 포춘 1000대 기업 가운데 일부도 기업용 소프트웨어 일자리를 시카고나 샌프란시스코가 아닌 신시내티·세인트루이스 등 비교적 생활비가 저렴한 곳으로 옮기고 있다. 미국 채용 전문 업체 인터그리티리소스매니지먼트의 케이스 심스 사장은 “(기업들은) 1년 전만 해도 백오피스와 핵심 운영 비즈니스 소프트웨어 부문의 기술직에 11만 달러~13만 달러를 지불했지만 이제는 경험이 적은 직원을 고용하는 한이 있더라도 8만 5000달러~10만 달러 정도를 지불하려고 한다”고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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