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북한 영변의 고농축우라늄(HEU) 제조 시설을 찾았던 미국의 시그프리드 헤커 박사는 저서 ‘핵의 변곡점’에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은 영변 핵 시설을 찾은 적이 없다”며 “피폭 가능성이 적지 않기 때문”이라고 언급했다. 이 때문에 정부는 북한이 13일 전격 공개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우라늄 농축 시설 공개 방문이 지닌 의미가 적지 않다고 보고 있다.
가장 큰 배경은 50여 일 앞으로 다가온 11월 미국 대선이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과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의 첫 TV 토론 직후 핵 시설을 공개해 미 대선에서 한반도 안보 문제를 집중 부각하겠다는 의도가 깔렸다는 분석이다. 최근 미국 민주·공화 양당이 새 정당 강령에서 ‘북한 비핵화’ 문구를 삭제한 가운데 국제사회의 북한 비핵화 원칙인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 가 비현실적이라는 점을 강조하겠다는 속셈도 있다.
특히 북한이 전날 동해상으로 단거리탄도미사일(SRBM)을 발사한 데 이어 전격적으로 핵농축 시설까지 공개하며 트럼프 전 대통령을 우회 지원하는 행보라는 해석 또한 나온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최근 “많은 핵무기를 가지고 있는 누군가와 잘 지내는 것은 좋은 일”이라며 “우리가 재집권하면 김정은과 잘 지낼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정성윤 통일연구원 통일정책연구실장은 “이번 농축 시설 공개는 미 대선에 개입하려는 의도가 다분하다”며 “특히 북한과의 타협을 강조하는 트럼프 전 대통령을 지원하려는 속내”라고 진단했다.
정부는 북한이 7차 핵실험을 비롯한 추가 도발에 나설 가능성을 주시하고 있다. 대통령실은 이날 북한의 우라늄 농축 시설 공개와 관련해 “북한의 공개 의도 등을 면밀히 파악하고 전반 동향을 관찰하고 분석 중”이라고 밝혔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북한이 미 대선을 앞두고 핵실험에 나설 것이라는 우려에 대해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한미 정보 당국이 긴밀히 추적 중”이라고 덧붙였다. 이날 노동신문은 김 위원장의 우라늄 농축 시설 방문 외에도 특수작전 무력 훈련 기지 시찰과 600㎜ 초대형 방사포(다연장 로켓포) 포차 성능 검증 현장 참관 등을 잇따라 공개했다.
다만 전문가들은 북한이 미 대선 전 7차 핵실험에 나설 가능성은 낮게 봤다. 박원곤 이화여대 교수는 “북한의 강력한 도발은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전혀 도움되지 않는 데다 CVID를 요구하는 목소리만 키울 수 있다”고 전망했다. 김 위원장의 행보 자체가 계산된 줄타기라는 분석도 있다. 한 대북 전문가는 “미국 입장에서 레드라인은 핵실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인데 노동신문에 공개된 사진은 미국보다는 대남용 성격이 짙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공개된 핵 시설이 기존에 알려진 영변이 아닌 평양 부근의 강선 단지라는 분석이 나온다. 강선 단지는 트럼프 전 대통령이 북미정상회담에서 요구했다는 이른바 ‘영변+플러스 알파(α)’로 ‘하노이 노딜’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조선중앙통신은 김 위원장의 우라늄 농축 시설 시찰을 공개하면서 위치를 밝히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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