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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클라우드가 만든 '21세기판 봉건제'

■테크노퓨달리즘(야니스 바루파키스 지음, 21세기북스 펴냄)

플랫폼 서비스 무료이용 대가로

빅테크, 개인의 데이터 수집·독점

경제 이익에 정치 권력까지 누려

디지털 영주·농노 착취체계 공고화

클라우드 자본 집단으로 소유 등

'데이터 노예' 벗어날 대안 제시도

/로이터연합뉴스




그리스 아테네의 한 초등학교 전경 /AP연합뉴스




옴니버스 영화 ‘나의 사랑 그리스(2015년)’의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주인공 지오르그는 불안과 공황 장애로 고통스러워 한다. 40대 임원인 그는 우울증 약 ‘로세프트’ 없이는 하루도 버티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다. 마음의 심연을 건드리는 근원적인 불안은 ‘밥벌이를 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필 감정적으로 끌린 여성이 자신이 다니는 회사의 구조조정을 진행하러 온 본사 담당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

당시 그리스의 경제적, 정치적 위기 속에 불안이라는 정서를 극도의 사실주의로 그려낸 이 영화에 단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국내에는 다소 낭만적인 제목으로 소개됐다는 것이다. 상당수 관객들에게 ‘맘마미아’와 비슷한 결의 영화로 오해를 받아 평가 절하됐지만 원제는 ‘분열된 세계(Worlds apart)’다.

이 시기 그리스는 채무 위기로 유럽연합 등으로부터 강도 높은 긴축 정책을 요구받으며 금융 협상을 진행하고 있었다. 2015년의 3차 협상을 이끈 그리스의 전 재무장관 야니스 바루파키스는 단 7개월 만에 재무장관에서 물러났지만 강도 높은 긴축 정책에 반대하면서 커다란 존재감을 남겼다. 십여년이 지난 지금 그는 그리스를 넘어 유럽의 근본적인 불안 요소로 새로운 구조적 문제를 제기한다. 신간 ‘테크노 퓨달리즘’에서 그는 산업혁명 후 이어진 자본주의가 사실상 붕괴하고 기술 봉건주의가 디지털 세상에서 봉건 영주와 농노의 착취 체계를 공고히 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가 만든 용어 ‘테크노퓨달리즘(Technofeudalism)’은 기술과 봉건주의의 합성어로, 소수의 빅테크 기업이 디지털 플랫폼에서 이용자들의 데이터를 수집하고 이를 기반으로 경제적 이익과 정치적 권력을 휘두르는 것을 의미한다. 새로운 봉건 영주는 클라우드 기업을 가진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구글 등을 비롯해 많은 디지털 플랫폼을 운영하는 빅테크다.

그에 따르면 디지털 세상에서 우리의 데이터는 우리의 것도, 국가의 것도 아니다. 데이터는 아마존, 구글, 애플, 메타(옛 페이스북) 등 각 디지털 플랫폼의 영토에 흩뿌려져 있다. 많은 사람들이 서비스를 무료로 편리하게 즐기는 대신 자발적으로 개개인을 특정할 수 있는 민감 정보와 취향, 관심사, 디지털 족적 등을 쉽게 제공한다. 그가 가장 경계하는 것은 과거 중세 시대의 봉건사회와 달리 새로운 봉건 영주와 농노의 관계는 강제성이 아닌 자발성을 띈다는 점이다.

클라우드와 인공지능(AI) 시대가 되면서 이 같은 착취적 관계는 비가역성을 갖게 됐다는 것이 바루파키스의 진단이다. 인공지능(AI)의 알고리즘을 고도화한다는 명목으로, 우리는 자발적으로 이들의 데이터 학습을 돕고 이를 정교화하는 방식으로 기꺼이 ‘무급 노동’을 한다. 챗GPT 등 생성형 AI를 쉽게 활용하면서 우리가 도움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이면의 이용자들이 입력하는 수많은 데이터와 명령(프롬프트)가 AI의 알고리즘을 더욱 강력하게 만드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그 대가를 주장하지 못한다. 이용자들은 알고리즘을 훈련시키는 역할까지 자발적으로 떠안게 되지만 그 과실은 클라우드 봉건 영주가 궁극적으로 가져가게 된다는 것.

이 같은 이야기를 풀어 가는 방식은 아버지에게 쓰는 편지 형식으로 이뤄졌다. 어린 시절 처음 느려 터진 컴퓨터를 접한 아버지가 바루파키스에게 “컴퓨터 네트워크는 자본주의 세상을 공고히 만들지, 아니면 자본주의가 지닌 약점을 드러낼 것인가”하고 질문한 것에 대해 기억력이 좋은 아들이 350페이지에 육박하는 책으로 대답한다. 그는 장기적으로 소수의 봉건 영주가 다수의 프롤레타리아를 착취하는 구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발적인 정보 제공의 문제점을 인식하는 캠페인부터 장기적으로는 클라우드 자본을 집단 소유하는 방식까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이는 유럽연합에서 강도높게 시행하는 데이터의 국외 이전 등을 금지하는 ‘개인정보보호법(GDPR)’에서 한 발 더 나아간 제안이다. 빅테크 기업이 단 한 곳도 없어 데이터 농노가 될 수밖에 없는 유럽과 그 외 많은 나라들이 비슷한 투쟁을 최후의 저지선으로 삼을 것이란 예상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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