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 추석 연휴를 앞두고 북한이 그간 은밀하게 운영해 왔던 고농축 우라늄(HEU) 제조시설을 전격 공개하며 전 세계 이목을 집중시켰다. 북한은 13일 관영매체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우라늄 농축 기지를 돌아보며 무기급 핵물질 생산에 총력을 다하라고 지시했다고 보도했다.
외신들은 북한이 핵탄두 제조에 필요한 핵물질인 HEU의 대량 생산 능력을 과시하며 미국에 비핵화가 아닌 핵군축 협상에 나서라는 메시지를 던졌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그 동안 북한 핵무기 개발 역사에 있어 전 세계와의 협상에서 HEU는 비핵화 협상의 ‘딜 브레이커’(협상의 결렬요인)로 작용해 왔던 게 현실이다.
북한이 HEU 확보를 목적으로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UEP)을 추진하고 있다는 의혹이 처음 불거진 것은 2002년 10월이다. 당시 북한을 방문한 제임스 켈리 미국 국무부 차관보가 원심분리기 제작에 쓰이는 고강도 알루미늄관의 통관 자료 등을 제시하며 의혹을 제기했다. 이에 북한 당시 강석주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이 “그보다 더한 것도 가지게 돼 있다”고 발언하며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북한은 이후 UEP 존재를 부인했지만, 미국 측은 이를 믿지 않았고 결국 2차 북핵위기로 비화하며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는 백지화됐다. 이후 북한은 2006년에 1차 핵실험에 성공했고 2009년 2차 핵실험을 한 이후 2010년 11월에 우라늄 농축시설을 공식적으로 확인했다. 북한은 당시 미국 핵물리학자인 시그프리드 헤커 박사를 초청해 영변 핵 단지에 있는 우라늄 농축시설을 공개했다. 헤커 박사는 북한이 영변에서 약 2000개의 원심분리기를 가동 중이라고 밝혔다.
북한은 2006년 제1차 핵실험을 시작으로 2009년 2차, 2013년 3차, 2016년 4·5차, 2017년 6차 핵실험까지 완료한 상태다. 2018년엔 미국과의 협상을 위해 풍계리 핵실험장 폭파 쇼 등의 기만 전술을 펴기도 했다. HEU는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에서도 협상이 결렬된 주요 요인으로 알려졌다.
당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영변 핵시설 폐기와 주요 대북제재 해제를 맞바꾸자고 제안하자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영변외 핵시설까지 협상대상으로 요구했다. 이에 북한이 응하지 않으면서 하노이 회담은 결국 ‘노딜’로 끝났다. 트럼프가 당시 요구한 영변과 풍계리외 핵시설은 강선 등에 설치된 HEU 제조시설로 추정했기 때문이다. 북한은 끝까지 추가 핵시설 지역은 없다고 부인했다.
북한이 최근 고농축 우라늄(HEU) 제조시설을 공개하면서 알려지지 않는 추가 핵시설 지역이 어딜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북한의 비밀 핵시설로 영변과 풍계리 이외에 지목되는 핵심 장소로 평양 인근 ‘강선’이 꼽힌다. 미국 과학국제안보연구소(ISIS)는 공개한 보고서를 통해 북한이 ‘강성’(kangsong)이라는 이름의 우라늄 농축이 가능한 비밀 핵시설을 운영하고 있고, 규모도 영변 핵시설의 두 배 이상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조선중앙통신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우라늄 농축 시설 시찰을 공개하면서 그 위치는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김 위원장이) 핵무기 현행 생산을 위해 능력 확장을 진행하고 있는 공사 현장을 돌아봤다’는 보도 내용을 바탕으로 최근 별관 공사 정황이 포착된 강선 단지일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에 공통적인 인식을 보이고 있다.
라파엘 그로시 IAEA 사무총장도 지난 6월 “올해 2월 말 강선 단지의 별관 공사가 시작돼 시설 가용 면적이 확장됐다”고 밝힌 바 있다.이 때문에 IAEA는 강선 단지가 영변의 우라늄 농축시설과 기반 속성이 유사하고, 최근 증축된 단지 내 건물이 완공 단계에 이르렀다고 진단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강선 우라늄 농축 시설이 평안남도 천리마 구역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평양에서 남서쪽으로 약 30㎞ 떨진 곳으로, 대동강에 붙어 있는 천리마 구역의 과거 이름인 강선 구역이다.
북핵 전문가들이 총 5곳을 북한의 핵실험장으로 꼽고 있다. 영변과 풍계리 핵실험장을 제외한 나머지 세 곳은 평안남도 강선과 함께 영변 인근 서위리·분강 등의 지하 비밀 시설이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실제 트럼프 전 대통령은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 당시 폭스뉴스와 인터뷰에서 “김정은 위원장에 당신은 합의할 준비가 안 됐다고 말했다. 그는 한두 곳(site)만 없애기를 원했지만, 다섯 곳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도 했다. 이어 “나머지 세 곳은 어떻게 할 거냐. (세 곳을 빼면) 그건 소용이 없다. 우리가 합의한다면 진정한 합의를 하자고도 했다”며 세부 협상 내용을 공개했다.
트럼프 전 미 대통령이 자신의 협상술을 자랑하면서 한 발언이지만, 은연중에 북핵 기밀을 공개했다는 분석이 잇따랐다. 이와 관련해 북한 전문가들의 분석이 연이어 나왔다. 당시 미 국방정보국 출신 브루스 벡톨 에인절로 주립대 교수는 미국의 소리(VOA)방송에 “트럼프 대통령이 영변 인근의 서위리의 핵시설을 언급한 것 같다”며 “정보당국은 이미 2010년 서위리 시설에서 영변보다 많은 양의 고농축 우라늄(HEU)을 생산하고 있다고 파악했다”라고 설명했다.
서위리는 2010년 11월 북한이 공개한 영변 단지 내의 우라늄 농축 시설을 건립하기 전부터 운영해온 지하 시설로 의심받던 곳이다. 한미 정보당국 역시 2000년 후반부터 영변 원자로로부터 서남쪽 약 10㎞ 지점의 수리봉(해발 301m)에 지하 시설이 있을 것으로 의심해왔다.
올리 하이노넨 전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차장은 미 현지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핵 개발의 기본 공정을 고려할 때 박천·평산 우라늄 광산과 원심분리기를 돌리는 강선 등 비밀 시설들을 고려하면 핵 관련 시설은 최소 5곳 이상”이라고도 했다. 그러면서 서위리 시설과 관련해 하이노넨 전 사무차장은 “1993년 영변 사찰 당시 영변에서 10㎞ 떨어진 지점에 또 다른 시설을 파악하고 사찰을 요청했지만 북한이 허용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셰릴 로퍼 전 로스앨러모스 연구소 연구원 역시 “핵분열을 가속하는 고성능 폭약을 만드는 시설은 폭발 위험 때문에 별도로 지어야 하므로 기폭장치 제조시설도 존재한다”며 “이란의 사례에서 관찰할 수 있듯이 북한도 똑같은 시설을 2곳씩 만들어 외부 정찰이나 공격을 피하려 할 수 있다”라고도 설명했다.
북핵 전문가들의 의견을 종합하면, 결국 북한도 핵물질·탄두핵·기폭장치를 각각 제조하고, 핵탄두를 조립·보관하는 시설까지 고려할 경우 전체 시설의 숫자는 알려진 것보다 더 많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북한이 영변과 풍계리 핵실장 이외에 추가적인 핵시설을 보유하고 있다는 추정이 나오는 이유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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