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한 여름이 갔다. 벌써 다음 여름이 걱정이다. 기후변화는 외딴 북극에서나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폭염으로 얼굴을 드러낸 현실의 위협이다. 약자를 겨누는 차별적 재난이라는 점도 특징이다. 쪽방촌과 다락방의 주민, 거리의 노숙인, 홀로 사는 어르신에겐 실존적 공포다. 택배‧건설‧설치 노동자에겐 1도의 변화가 밥벌이의 뇌관이다. 겪지 않으면 결코 알지 못할 현실이다. 나도 안다고 말할 처지는 아니다.
폭염은 경제의 활력도 앗아간다. 온열질환으로 의료비 지출이 늘면 가처분소득이 감소한다. 소비 여력 없는 서민에겐 이중고다. 야외 노동이 필수인 산업에선 생산성이 줄어들 것이다. 일자리 소멸은 필연이다. 불황은 피하려야 피할 수 없다. 신용평가사 무디스는 폭염으로 인한 만성적 위험이 세계 GDP(국내총생산)를 2100년까지 최대 17.6% 위축시킬 수 있다고 추정한다. 그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약자의 몫이다.
고립은 폭염 사망의 방아쇠가 되기도 한다. 1995년 7월 미국 시카고의 기온이 41도로 치솟았다. 일주일간 이어진 폭염에 7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노인과 빈곤층, 1인 가구가 다수였다. 희생자들은 후덥지근하고 통풍이 안 되는 사적인 공간에 갇혀 홀로 숨을 거두었다(에릭 클라이넨버그 ‘폭염 사회’). 2003년 8월 프랑스에선 폭염으로 1만 5000여명이 숨졌다. 혼자 살거나 꼭대기 다락방에 사는 노인이 주로 화를 입었다. 프랑스 기상청이 관측한 최고기온은 44.1도였다.
손을 건네는 이웃이 있다면 폭염은 고통일 순 있어도 비극으로 치닫지는 않을 것이다. 서울시의 해법을 소개한다. 지난 여름 서울시는 어르신과 노숙인 등을 대상으로 맞춤형 돌봄 활동을 실행했다. 취약 어르신께는 격일로 전화해 안부를 묻고, 받지 않으면 직접 방문했다. 복지플래너를 통해 폐지 수집 어르신의 건강을 확인했다. 노숙인 밀집지와 쪽방촌 관리 인력을 늘려 상담과 순찰도 강화했다.
장기 처방도 찾고 있다. 열쇠는 온실가스 저감이다. 그런 뜻에서 기후동행카드는 단순한 교통 복지가 아니다. 대중교통 활성화로 일상에서 기후 위기에 대응하겠다는 다짐이다. 제도화는 훨씬 복잡한 문제다. 서울시가 시행 중인 약자동행지수에 기후 약자를 위한 사회안전망을 반영하는 안도 고민할 만하다.
1941년 1월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 대통령은 의회 연두교서에서 4가지 자유를 역설하면서 세 번째로 ‘궁핍으로부터의 자유’를 꼽았다. 루스벨트는 이런 말도 덧붙였다. “빈곤한 사람은 자유인이 아니다.” 그의 말을 원용하면 이렇다. “땡볕에 방어막도 없이 노출된 사람은 자유인이 아니다.” 전례 없는 ‘9월 폭염’이 전한 메시지는 분명하다. 이제 ‘폭염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할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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