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 남성 알 해리슨 미국 항공우주국(NASA·나사) 국장이 커피포트에 붙은 유색인종이라는 스티커를 떼어내고 유색인종 화장실 간판을 망치로 부순다. 지독한 차별에 시달리던 흑인 여성 전산원 캐서린 존슨은 천부적인 재능을 발휘해 나사의 유인 우주선 프로젝트 ‘머큐리 계획’에 힘을 보탠다. 1950년대 말 실화를 바탕으로 2016년 제작된 영화 ‘히든 피겨스’에서 나오는 장면이다.
지난달 미국 의회는 이 영화의 모티브가 된 실존 인물들에게 의회 금메달을 수여했다. 캐서린 존슨, 도로시 본, 메리 잭슨, 크리스틴 다든을 비롯해 수학자·엔지니어 등으로 활약하며 우주탐사에 기여한 여성들이 영예를 안았다. 마이크 존슨 하원의장은 “이들은 미국의 강점이 모든 시민의 재능을 활용하고 분열을 넘어 미래를 바라보는 능력에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냉정하게 따지고 보면 당시 흑인 여성들의 인간 승리가 미국에서 조망받기까지 반세기가 넘는 시간이 걸렸다. 그만큼 미국 사회에서 인종 갈등은 뛰어넘기 힘든 문제다. 물론 지금 미국은 표면적으로 차별이 사라졌고, 흑인 여성들의 인권도 크게 신장됐다. 하지만 직장 동료나 친구로서가 아니라 흑인 여성 대통령을 떠올리면서 머뭇거리는 미국인들을 많이 만난다. 미국이 과연 이 심리적 마지노선을 넘을 수 있느냐를 가늠할 ‘세기의 선거’가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올해 미 대선에는 인플레이션·이민·낙태 등 표심에 영향을 끼치는 수많은 이슈들이 있지만 쉽게 입 밖으로 꺼내 놓지 않는 불편한 진실이 있다. 바로 민주당 후보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흑인 여성이라는 점이다. 그 어떤 여론조사도 대놓고 해당 주제를 두고 유권자의 호불호를 조사하지 않는다. 하지만 미국 내 많은 선거 전문가들은 바로 이 문제가 미국 사회 주류인 백인 남성들의 표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본다. 송원석 한인유권자연대 사무국장은 “‘미국이 흑인 여성을 대통령으로 뽑을 준비가 돼 있느냐’라는 질문은 이번 선거에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화두”라며 “이를 의식해 해리스는 본인의 인종과 성별에 대한 언급을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다는 분석이 있다”고 짚었다.
해리스의 선거 캠페인을 봐도 그가 얼마나 백인 남성 표를 의식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대표적으로 해리스가 선택한 러닝메이트(부통령 후보) 팀 월즈 미네소타 주지사는 재향군인에 풋볼 코치 출신으로, 러스트벨트(쇠락한 공업지대)의 블루칼라 남성들을 끌어오기 위한 맞춤형 인선이다. 대선을 한 달 앞두고 해리스 캠프는 경합주를 중심으로 남성들이 즐겨 찾는 메이저리그, 대학 풋볼, 축구 경기 등에 천문학적 광고 비용을 투입하고 있다. ‘해리스를 위한 백인 남성들’이라는 단체까지 출범했는데 이는 백인 남성들을 설득하는 것이 해리스 입장에서 매우 절박한 문제라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1~2% 지지율만으로 승패가 바뀌는 초박빙 구도의 선거에서 해리스의 성별과 인종을 바라보는 백인 남성들의 복잡한 시선이 선거 당일에 어떻게 분출할지 미 정치권이 주목하는 이유다. 특히 대선 승패를 좌우할 최대 경합주 펜실베이니아는 백인 비율이 80%에 달해 낙후된 교외 지역의 블루칼라 남성들을 붙잡지 않고는 이길 수 없다.
펜실베이니아는 2016년 트럼프를 찍었다가 2020년 다시 조 바이든으로 돌아섰는데, 그 배경 중 하나로 바이든이 ‘펜실베이니아 출신의 백인 남성’이었다는 점이 지목된다. 이런 이유로 다수의 전문가는 현재 박빙 판세가 여전히 해리스에게 불리한 형국이라고 보고 있으며 해리스 역시 자신을 ‘언더독’으로 칭하고 있다. 전직 미 당국자는 “해리스가 흑인 여성 대통령이 되면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면서 “내각과 백악관과 국가 요직의 인종과 성별이 바뀔 것이다. 주류 백인들이 이를 감내할 수 있느냐가 이번 선거에서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중대한 변수”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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