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움직인다. 지난해 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직접 남북 관계를 “적대적인 두 국가 관계, 전쟁 중에 있는 완전한 두 교전국 관계”라고 선포한 바 있다. 그러면서 대한민국을 불변의 주적으로 확고히 간주하도록 교육 교양 사업을 강화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통일 포기 선언으로 불리는 북한의 대남 노선 전환은 북한 주민에게 제대로 전파되지 못했다. 북한은 중차대한 정책의 변화가 있으면 우선 노동신문과 조선중앙티비 등 북한 주민이 접근 가능한 매체를 통해 대대적으로 이유와 명분을 설명하고 학습서를 만들어 주민을 상대로 교육하는 것이 통례다. 그러나 민족과 통일을 부인한 김정은의 발언 이후 10개월이 지나도록 침묵했고 이제야 본격적으로 빌드업을 시작했다.
김정은의 목소리가 점점 거칠어지고 있다. 김정은은 10월 2일 윤석열 대통령을 “온전치 못한 사람”이라고 비난하면서 대한민국을 ‘적’으로 규정하고 필요시 “핵무기를 포함한 수중의 모든 공격력을 사용할 수 있다”고 위협했다. 7일 김정은국방종합대학을 방문해서는 “적이 어떤 적인지 똑바로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2년여 만에 윤 대통령을 다시 실명 비난하고 연이어 한국이 침략전쟁을 준비한다면서 최대치의 대응을 천명하고 있다. 대한민국이 주적이라는 정체성을 명확히 했다.
북한 총참모부도 나서서 대한민국 영토와 철저히 분리하기 위해 남쪽 국경을 차단한다는 요새화 작업을 공개적으로 선포했다. 이후 실체가 명확하지 않은 무인기가 평양 상공에 나타났다면서 외무성 중대 성명과 김여정의 심야 담화를 통해 “철면피한 대한민국 족속들”이라며 최대치의 적대감을 표출했다. 스스로 혁명의 심장부라고 부르는 평양이 뚫렸음을 인정하면서까지 북한 전 주민이 보는 노동신문 1면에 무인기 비행과 전단 살포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다시 어제 노동신문 1면을 통해 ‘극악한 원쑤’ ‘한국괴뢰놈들’ ‘원쑤격멸전’ 등의 선동이 담긴 주민 인터뷰를 실었다. 북한 주민의 눈앞에서 대한민국을 철저한 적국으로 만들려 한다.
이 모든 것은 북한이 민족 통일을 포기하려는 시도다. 북한에 민족과 통일은 말 그대로 전부다. 모든 것이 통일로 치환된다. 예를 들어 북한은 1990년대 100만 명 이상이 굶어 죽은 것으로 알려진 ‘미공급 시기’에 극단적으로 어려웠던 원인이 조국 분단이라며 통일이 되면 다 해결된다는 논리를 펼쳤다. 권력 세습도 ‘혁명적 수령론’에 따라 조국 통일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백두혈통의 위대한 영도자가 필요하다는 명분을 만들었다. 따라서 민족과 조국 통일을 부인하는 것은 김정은 체제 정통성을 근본적으로 훼손하는 행위다. 김정은도 일단 질렀지만 이런 상황에 큰 부담이 있었기에 지난 10개월 침묵하며 고뇌했을 것이다. 그러나 통일을 대체할 국가 지배 담론은 여전히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1월 김정은이 직접 다음번 최고인민회의에서 민족 통일을 포기하는 내용을 포함한 헌법 수정을 지시한 바 있다. 그러나 7~8일 개최된 최고인민회의 14기 11차 회의에서 개정했는지 불확실하다. 수정했든, 못 했든 발표하지 않은 것 자체가 북한 주민을 상대로 설득하기 어려움을 방증한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으로 결국 북한이 선택한 것은 ‘피포위 의식’ 고취다. 사회주의국가에서 흔히 확인되고 특히 북한이 오랜 기간 만능의 보검처럼 사용해온 것이다. 외부 위협을 최대한 부각해 주민을 단합시키는 전략이다. 한국과 미국·일본 등 제국주의 상전과 괴뢰 세력들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붕괴를 획책하므로 단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한민국을 철저한 타국이자 최대의 주적으로 상정하고 민족 개념도 ‘김일성 민족’과 ‘대한민국 족속’으로 구분한다.
그러나 북한 정권이 아무리 위협 수위를 높이고 한국을 분리하려 해도 김정은의 통일 포기 선언은 심각한 자충수다. 지난 70년간 규범화돼 자발적 순응으로 발전된 주민 통제를 위한 핵심 명분과 담론을 대체할 것은 없다. 결국 그 분열된 믿음 체계는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북한 체제에 깊은 도전을 가져올 것이다. 그들은 단결을 외치지만 내부의 균열은 이미 시작되고 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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