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자와 기업들이) 내년뿐만 아니라 향후 10년과 그 이상을 계획할 수 있는 자신감을 줄 것입니다.”
조너선 레이놀즈 영국 기업·통상부 장관은 ‘투자 2035: 영국의 현대적 산업 전략’을 발표하며 이렇게 강조했다. 영국 정부가 최소 10년 이상의 긴 시각으로 미래 산업 정책을 짜고 지원할테니 안심하고 영국에 투자하라는 얘기다. 기업과 투자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불확실성을 정부가 나서 해소해 준 셈이다.
영국이 7년 만에 정부 주도의 신산업 정책을 내놓은 배경에는 갈수록 치열해지는 글로벌 산업 전쟁이 자리 잡고 있다. 반도체·배터리·인공지능(AI) 등 첨단산업의 경쟁에서 더 이상 밀려서는 안 된다는 위기 의식의 발로라는 것이다. 더욱이 세계무역기구(WTO) 체제의 붕괴로 미국과 중국, 유럽연합(EU), 일본 등은 반도체 등에 막대한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다. 다음 달 초 미국 대선에서 보호무역주의를 앞세운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당선될 경우 가격 경쟁력과 기술력 선점을 위한 국가 간 보조금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장기적인 시각의 산업 정책과 이를 기반으로 한 과감한 정부 지원이 절실할 때이지만 정부와 정치권의 대응은 아쉬운 대목이 많다는 지적이 나온다.
당장 정부의 산업 정책만 살펴봐도 알 수 있다. 국내 산업 정책을 총괄하는 산업통상자원부가 올 2월에 내놓은 ‘신산업 정책 2.0 전략 보고서’를 보면 수치를 나열하는 데 그치고 있다. 보고서에는 올해 목표로 △10대 제조업 투자 100조 원 △외국인 투자 350억 달러 △사상 최대 수출 실적 7000억 달러가 표기돼 있다. 비전으로는 산업 경쟁력 회복과 경제 활력 회복을 제시할 뿐 영국의 신산업 정책 방안처럼 10년 이상의 장기 비전 내용은 없다. 민간 영역의 투자를 뒤에서 지원해주거나 기존에 발표한 대책들을 모아놓은 수준에 불과하다. 기업이 10년 이후의 투자 계획도 세울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한 영국 기업·통상부 장관의 자신감은 국내 산업 정책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는 최근 발표한 AI 연구개발(R&D) 프로젝트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정부는 산업 현장 기술 혁신 가속화를 위한 ‘AI+R&D 추진 전략’이라는 이름의 16쪽짜리 보고서를 냈다. 2030년까지 600개 R&D 프로젝트를 단계별로 추진하고 2032년까지 산업부 신규 R&D 과제 100%를 투입한다는 것이 사실상 내용의 전부다.
산업부가 산업 정책을 조율하는 컨트롤타워 역할을 충분히 해내고 있는 것도 아니다. 여러 부처의 산업 관련 정책들을 총괄하는 기능은 예산 권한을 가진 기획재정부에 뺏긴 지 오래다. 석유화학 산업의 경우 구조조정이 절실하지만 시간만 가고 있다. 전직 산업부 고위 관료는 “정부 내에서 사업의 큰 틀 안에서 기업 현장의 애로를 소개하고 정책에 담는 부처는 산업부였다”면서 “과거에는 예산권을 쥔 기재부와 많이 다투고 했는데 요즘엔 그런 야성이 사라진 것 같다”고 말했다.
문제는 미중일은 경제 안보 차원에서 반도체 지원에만 수십조 원을 퍼붓고 있다는 점이다. 반면 한국의 직접 보조금은 0원이다. 디스플레이와 배터리 등 다른 국가 핵심 기술 산업도 별반 다르지 않다. 정치권이 뒤늦게 반도체 산업 등에 직접 보조금을 지급하는 것을 뼈대로 한 법안을 발의했지만 정쟁에 휘말려 좀처럼 논의에 속도를 못 내고 있다. 통상 전문가인 표인수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는 “반도체가 신산업은 아니지만 핵심 산업이기 때문에 국회와 같이 힘을 모아서 가야 하는데 국회가 잘 움직이지 않아 안타깝다”고 토로했다.
산업 정책의 실종은 다음 달 초 미 대선을 앞두고 확대되고 있는 트럼프 리스크와 맞물려 국내 산업에 암운을 드리고 있다. 트럼프 후보는 최근 한국을 ‘무임승차국’으로 비난한 데 이어 한국에 있는 일자리를 미국으로 빼앗아 오겠다고 밝혔다. 산업연구원에 따르면 트럼프 당선 시 자동차와 배터리, 철강 산업 분야가 타격을 입을 것으로 예상된다. 정철 한국경제연구원장은 “우리 경제 활력을 위해서는 한국에 전략적인 산업 정책이 필요하다”며 “재정 건정성도 중요하지만 미래를 위한 투자라는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지금은 매우 중요한 변곡점이라 타이밍을 놓치면 안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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