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의 중심부, 어느 건물 안에서 근무하는 디자이너는 문득 바깥세상에서 일하고 있는 다른 디자이너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궁금해졌습니다. 각자의 장소와 공간에서 특별한 지금을 보내고 있을 그들과 만나 또 다른 미지의 장소와 공간을 탐험해 보고자 합니다.
‘글문화연구소’ 유지원 소장은 타이포그래피를 기반으로 연구자, 저자, 강연자 등 다방면에서 활동하는 디자이너다. 서울대학교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한 후, 독일 라이프치히 그래픽서적예술대학에서 석사를 마쳤다. 민음사에서 디자이너로, 산돌커뮤니케이션에서 연구자로 경력을 쌓았고, 국제비엔날레 ‘타이포잔치 2013’에서는 큐레이터로 활약했다. 또한, 홍익대학교 시각디자인과 겸임교수를 역임하며, 서울대 등에서 10여 년간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연구자로서 유지원은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위한 글자 개발에 헌신하고 있다. 저자로서는 글자 풍경(2만 부), 뉴턴의 아틀리에(3만 부)를 출간했으며, 현재 책 풍경, 글자의 말들, 삼각함수(가제), 독일어(가제) 관련 책을 집필 중이다. 강연자로서 그는 중고등학교 교사 및 교육 연구자, 학생을 비롯해 과학, 의료, 법조계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에게 타이포그래피와 디자인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최근 디자이너로서 민음사 ‘셰익스피어 전집’ 디자인을 총괄해 큰 화제를 모았다. 이전에도 보드리야르의 ‘사라짐에 대하여’를 비롯 다양한 고전 문학과 철학 서적의 디자인 작업을 담당하며 한국 북 디자인계에 굵직한 족적을 남겼다.
유지원 소장은 다년간의 활동에서 얻은 지식과 경험을 통합적 관점으로 정리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재구성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그 중심에는 여전히 타이포그래피가 있을 예정이다.
◇작업실 이야기
Q. ‘글문화연구소’ 로고가 둥글둥글 아름다운데요. 그 의미가 무엇인지, 소장으로서 연구소에 어떤 비전과 목표를 담고 계신지 여쭙고 싶습니다.
2021년에 지금의 공간으로 이사 오면서 ‘글문화연구소’ 현판을 내걸게 됐어요. 보건학자인 김승섭 교수님이 제안해 주신 이름인데요. 이 이름으로 글과 글자에 관한 무궁무진한 여정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대로 감사히 쓰고 있습니다.
로고는 직접 디자인했어요. 가운데 한자 ‘文’이 있고 왼쪽에 로마자 ‘t’ (typography의 앞 글자), 오른쪽에 한글 ‘글’이 있죠. 로마자, 한자, 한글이 서로 손을 맞잡은 형상이에요.
글자들을 둘러싼 물방울 두 개가 하나로 이어지는 형상에는 ‘응집’의 뜻을 담았어요. 여러 분야와 다양한 요소들이 서로 만나 하나의 물방울을 이루는 모습을 시각적으로 표현했답니다. 연구소가 다방면의 협업과 활동을 통해 포괄적이고 총체적인 시야를 갖는 것을 의미해요. 결국 글과 글자를 구심점으로 견고한 문화를 만들어가는 것이 ‘글문화연구소’의 비전인 셈이죠.
Q. 작업실의 위치와 공간이 가지고 있는 힘은 작업 활동 동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글문화연구소’ 의 가장 매력적인 점은 무엇인지 말씀해 주세요.
이 공간이 저에게 주는 가장 큰 의미는 기반과 토대입니다. 저는 강연이나 글을 통해 예술가로서의 사유와 경험을 사람들과 나눠야 할 때가 많아요. 그렇기 때문에 창작자로서 제 이야기가 권할만한 것이 되게 하려면 적어도 자력으로 안정감 있게 생활을 영위하는 모습을 입증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예술인 여성으로서 가족이나 동반자의 도움 없이 자립하는, 지속 가능한 모델을 제 삶 자체로 제시해야 듣기 좋은 소리에 그치지 않는 것이 되죠. 저는 저의 글과 작업을 좋아하고 공감하는 분들이 저의 세계를 만남으로써 좋은 삶을 가지기를 바랍니다. 그러려면 제가 먼저 좋은 사람이 되어 있고 좋은 삶을 살고 있어야 해요. 이 공간을 확보한 것은 그럴 수 있기 위한 다짐의 토대라고 할 수 있어요.
다만 동네가 서울과 가깝긴 해도 연남동이나 서촌, 이태원 같은 문화적 요소가 부족한 점이 아쉽긴 합니다. 앞으로 운전으로 해결해야겠죠(웃음).
◇작업 이야기
Q. 최근 민음사에서 셰익스피어 전집이 출간돼 화제입니다. 10년에 걸쳐 디자인을 진행하셨다고요. 작업하면서 중요하게 생각했던 요소는 무엇인가요?
전집 디자인을 완성한 후 제가 가장 큰 보람을 느끼는 부분은 10년이 지나도 식상해지지 않았다는 점이에요. 디자인처럼 짧은 호흡의 트렌드에 민감한 분야에서 10년이라는 긴 호흡의 작업을 진행했지만, 처음 시작했을 때부터 완성된 지금까지도 ‘이거 10년 전 디자인이잖아’. ‘옛날에 유행했던 스타일이잖아’ 하는 느낌이 들지 않아요. 수학적 계산을 많이 거쳐서 아무나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방식을 사용한 덕분이죠. 제가 사람들이 풀기 어려워하는 문제에 도전하는 걸 좋아하거든요(웃음). 덕분에 고유성을 갖게 되고,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작업은 아니라는 아우라도 생긴 것 같습니다. 이런 요인들이 맞물려 디자인에 ‘10년을 버텨낸 힘’이 실리지 않았을까요?
Q: 셰익스피어 전집 작업 당시 서체 선택 과정은 어땠나요?
전집 의뢰를 받았던 2013년 당시에는 고전 문학서의 표지나 본문에 쓸만한 한글 폰트의 선택지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셰익스피어는 명조체처럼 점잖은 얘기만 하지도 않고, 고딕체처럼 단순한 얘기를 하지도 않아요. 명조체의 품격과 고딕체의 판독성을 유지하면서도 특유의 활력을 가진 글자체가 필요했죠. 그래서 ‘셰익스피어 전집’ 이렇게 딱 일곱 글자만 만들기로 했어요.
서울대학교에서 제 타이포그래피 수업을 듣던 학생들이자 후배들, 다른 대학의 몇몇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프로젝트에 참여해 줬습니다. 이 친구들이 만든 후보들을 민음사 편집부에 보여드렸고 지금은 네이버 소속 디자이너로 활동 중인 조윤준 씨가 만든 글자가 채택됐지요. 그에 대한 비용도 물론 제대로 지불했습니다. 재능과 노고에 대한 정당한 보상은 중요하니까요(웃음)!
표지에 사용된 서체의 완성도를 100프로까지 끌어올리기 위해 마지막에는 제가 조금 손을 봤고요. 결과적으로 셰익스피어 다운 느낌이 생명력 있게 살아나서 좋았어요. 다시 봐도 표지 제목 ‘셰익스피어 전집’ 일곱 글자에 더 어울릴만한 상용 한글 폰트는 잘 떠오르지 않아요. 당시 참여해 준 친구들도 어느덧 10년이 지나 훌륭한 디자이너로 성장했더라고요. 그때 함께 해준 친구들에게 다시 한번 애정을 담아 고마움을 전하고 싶습니다.
Q. 겉표지에는 색을 사용하지 않았는데, 내지에는 색을 사용하셨네요?
그게 관철된 것도 사실 민음사가 가진 저력이라고 생각해요. 책이 소비자와 독자들의 주목을 받으려면 색상을 적절히 활용해야 하는데요. 컬러를 사용하는 순간 시리즈가 연결되지 않고 결과적으로는 쪼개지는 형태로 책장에 꽂혀있게 됩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셰익스피어 전집은 겉표지를 블랙 앤 화이트로 강한 덩어리감을 주려 했어요. 열 권 전집 책등의 면적은 폭이 33cm, 높이가 23cm로, 4호 캔버스 크기에 맞먹는데요. 이만한 면적이면 독자의 공간을 아름답게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어요(웃음). 전체적으로는 현대적이고 수학적인 문학 추상화로 감상되기를 바랐어요. 또 조립식으로 작업해서 어떤 순서로 바꾸어 꽂아도, 몇 권이 비어도, 전체 책등에 흐르는 도형들의 리듬감이 유지될 수 있도록 의도했죠.
독자들 입장에서는 블랙 앤 화이트로 시작했으니 끝까지 그 방식으로 이어질 거라고 예상하셨겠지만, 내지에 색을 넣어서 한 번 환기되는 경험을 주고 싶었습니다. "이렇게 흘러가겠지"라고 예상하는 순간 허를 찌르듯 새로운 느낌을 주는 요소가 될 거라고 계산했어요. 셰익스피어 다운 경험이라고 생각했죠(웃음). 참고로 색은 영국 패션 브랜드 폴스미스에서 영감을 받았답니다!
Q: 셰익스피어 전집 외의 디자인 작업에서도 수학적인 원리를 시각화하는 방식이 돋보입니다. 평소에도 이런 방식을 선호하시나요?
유클리드의 기하학을 넘어서 현대 수학 이론들을 기반으로 하면 감으로는 도달하기 어려운 정교한 형상에 이를 수 있게 됩니다. 어떤 현상을 그래픽으로 표현할 때는 필연적으로 주관이 개입되는데요, 수학은 수치화, 정량화되는 환원적인 성격이 있어 이를 기반으로 할 때 그래픽 표현과 개인의 주관에 대한 태도를 더 분명하고 깨끗하게 가져갈 수 있어요.
디자인은 단순히 아름답게만 꾸미는 작업이 아니라 다양한 방법론을 가지고 있어요. 시스템에 기반해 만들어진 디자인은 단순한 장식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이런 접근이 즐거워서 기하학이나 수학적 원리를 그래픽에 접목하는 방법을 자주 사용하곤 하죠. 여기서 이야기를 발견하고, 나아가 그래픽으로 표현하는 것은 디자이너이기에 할 수 있는 일인 것이지요. 현재 삼각 함수에 관한 책도 집필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수학과 디자인의 만남을 더욱 탐구하고 싶어요!
Q. 비전공자인 일반 독자들이 책을 읽을 때 본문에 대한 ‘편집 디자인’이 잘 와닿지 않을 수 있는데, 사실은 디자이너의 많은 고민이 함축적으로 담겨있는 분야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본문 디자인에서 특히 주의 깊게 신경 쓰신 부분이나, 독자들이 눈여겨봤으면 하는 요소가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셰익스피어의 극은 운문과 산문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민음사 전집의 특징은 ‘운문 번역’이라는 점이에요. 그리스에서 셰익스피어 시대인 르네상스까지 이어지는 서양 정형시의 역사와, 한시부터 이어진 동양 정형시의 역사를 한글의 리듬감 안에 품게 하는 장엄한 작업이죠. 본문도 이 운문의 성격, 산문의 성격, 극의 성격, 그리고 많은 각주가 달리는 성격을 총체적으로 고려해 정교한 시스템을 기반으로 디자인했어요. 재밌는 점은 번역자께서 디자인 시스템을 파악한 후 한 행에 들어가는 글자 수를 감안해 행이 넘어가지 않도록 조절하며 번역하셨다고 해요. 생각 못 하셨겠지만 사실은 번역 행위에 타이포그래피 행위가 개입돼 있는 거죠.
펼친 페이지의 전체 시스템을 ‘레이아웃’이라고 한다면 획과 흰 공간 등 글자 공간의 단위를 다루는 일은 ‘마이크로 타이포그래피’라고 합니다. 큰 틀이 잡힌 가운데 디테일을 파고드는 작업인데요. 셰익스피어 극의 본문에는 숫자가 여러 층위로 등장합니다. 그래서 한글은 가독성 높은 명조체를 쓰고, 숫자는 너무 두드러지지 않도록 특별한 활력을 가지는 로마자 폰트로 골랐어요. 문장부호는 제가 직접 디자인해서 넣었답니다. 본문의 작은 요소들이 독자들에게 생동감을 주길 바라면서요. 특히 이 물음표가 참 귀엽지 않나요? 제가 가장 귀여워하는 페이지예요(웃음).
이런 이야기를 하면, ‘누가 그런 것까지 알아 봐주냐’ 하는 의문이 들 거예요. 꼭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일반 대중들 역시 작업자가 상당한 시간과 정성을 쏟은 디자인은 어느 정도 느끼시는 것 같아 충분히 만족합니다.
Q. 10년간의 프로젝트가 끝난 후, 완간된 전집을 보며 어떤 감정을 느끼셨는지.
이제부터 시작인 것 같아요. 지금부터 더 부지런히 독자들을 만나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할 예정이에요. 전집 프로젝트는 앞으로 더 다양한 분야와 깊이 연결될 출발점을 시사하고 있어요. 셰익스피어를 중심으로 수학과 디자인, 그리고 타이포그래피와 물리가 곁들여진 이야기들이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전개될지 기대가 큽니다.
Q. 학부시절부터 타이포그래피에 관심이 많으셨나요?
사실 굳이 따지자면 타이포그래피라는 분야 자체에 대한 관심보다는 원래 언어와 세상의 각종 지식 체계, 그리고 시각화에 관심이 많았거든요. 타이포그래피가 그림과 글의 교집합이잖아요. 텍스트 다루는 것을 워낙 좋아하고 책도 많이 읽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마음이 스며든 것 같아요. 어느새 정신 차리고 보니 ‘글문화연구소’ 소장이 돼있네요(웃음).
Q. 독일에서 유학을 하셨는데 왜 독일이었을까요? 그리고 왜 라이프치히였을까요? 계기가 궁금합니다.
중학교 때 주변 어른들의 좁은 범주에서 벗어나 더 폭넓은 선택지에서 롤모델을 찾고 싶었어요. 그렇게 제가 도달한 곳에는 독일 문인들과 음악가들이 있었어요. 자연스레 독일어를 익혔고 그 나라의 문화적 정수가 어떻게 형성됐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미술과 디자인 전공 분야로 슈투트가르트나 뒤셀도르프, 베를린 같은 도시의 대학들이 잘 알려져 있지만 저는 독일에만 있을 것 같은 어떤 고유한 학풍을 지닌 곳, 라이프치히에 끌렸어요. 타이포그래피의 대가 얀 치홀트 선생님께서 공부하신 곳이기도 하고요. 우리나라에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이 독특한 매력의 대학을 꼭 경험해 보고 싶었어요. 단순히 최고의 학교를 가서 그 영향력을 누리겠다는 생각보다는, 전체의 상을 불완전하나마 스스로 연결해서 조망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미국의 예일 같은 우수한 학교들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선택하는 곳이니, 저는 조금 다른 길을 가보자는 생각이었죠. 제 디자인 철학과도 세계관이 비슷하죠(웃음)?
Q. 독일에서 귀국 후 한국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어떤 차이점을 느끼셨나요?
독일은 미술대학이 종합대학으로부터 분리돼 있어 자치권이 강해요. 캠퍼스 건물을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어서, 학교 전체가 거대한 캔버스와 같죠. 독일 학생들은 공간을 자유롭게 사용하면서 더 대담하고 거침없는 작업을 해요. 반면, 한국에 돌아와 보니 학생들이 몸을 잘 안 쓰고, 소심한 작업을 하는 경향이 있더라고요. 살짝 답답한 마음이 들었어요. 특히 컴퓨터 앞에서 마우스와 키보드만 딸각이는 분위기가 강했죠. 그래서 강의할 때 학생들에게 몸을 좀 더 활용해 디자인해 보라고 조언을 많이 했어요.
자세히 관찰해 보니 한국은 미술대학이 자치권이 없고, 학교에서 벽에 포스터 하나 붙이려면 본부 행정실의 허가를 받아야 하더라고요. 마치 아파트에서 관리사무소 허가 없이는 게시물을 붙일 수 없는 것처럼요.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여지를 제한하니까 이런 환경이 당연히 학생들의 창작 활동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아요.
사실 독일은 '엄격하고 고지식한 나라'라는 선입견이 있어요. 맞는 말인데(웃음) 독일은 '미술 교육에 자유를 허용해야 한다'는 가치에 엄격해요. 학생들이 창작 과정에서 자유를 존중받고, 그만큼 대담하게 작업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돼 있죠. 독일의 ‘엄격함’이란 그런 거더라고요. 한국과 독일 미술 교육의 가장 큰 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Q. 그래픽 디자인 전공 교수이자 작가, 박물관 및 디자인 연구소에서 큐레이터, 기획자로도 활동 중인 엘런 럽튼의 미국 대학원 강의 교재에 글이 실렸다고 들었습니다.
네, ‘타이포그래피와 간지역성(인터-로컬리티)’에 대한 저의 인터뷰가 그분의 인스타그램에 교재 사진으로 올라와 있더라고요. 영국에서 공부하시던 정소담 씨가 진행한 영어 인터뷰였는데요. 영어와 로마자의 일방적인 글로벌리티에 대응해 세계의 다양한 언어와 문자들의 인터-로컬리티로 응답하자는 취지를 전했었죠. 인터뷰가 온라인 매거진에 실린 것을 보고 교재의 텍스트로 채택한 것 같았어요. 엘런 럽튼은 제가 학부 때 디자인 저서로 접한 분이라 신기한 경험이었습니다.
이 인터뷰와 관련해 인상 깊었던 경험이 또 하나 있어요. 스위스에서 열리는 온라인 강연에 연사로 초청을 받았는데요. 제가 당시 영어를 자주 쓰지 않고, 이 주제에 주력하고 있지는 않아 준비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어요. 결국 응하지 못했는데 그분들이 저를 한 번 더 설득하시더라고요. 그들 모두 유럽에 체류하는 중이긴 하지만, 자신들 중에 영어가 모국어인 사람은 한 명도 없다고요. ‘외국인이 사용하는 영어가 더 많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하고, 그들이 사용하는 영어 역시 정당한 영어로 인정받아야 한다고 강조하셨어요. 그러니 영어가 네이티브처럼 유창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하더군요. 영어에 대한 탈 중심적 사고방식을 접한 기억이 강렬하게 남았습니다.
Q. 어린이나 시니어 등 약자를 위한 타이포그래피 연구는 디자인이 사회적 역할을 통해 긍정적인 영향을 발휘하는 좋은 사례로 보이는데요. 이러한 연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와 그 과정에서 느끼신 점이 있다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제가 연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사회가 점점 더 다양성을 중시하는 분위기와 맞물리는 것 같아요. 비록 저는 개인 연구자이지만, 사회 속에서 살아가면서 소수자나 약자들이 경험하는 세상을 연구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그동안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지역에 거주하며 신체적으로 건강한 성인 남성을 중심으로 사회의 표준이 형성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소수 약자들은 이런 표준에 맞추기 위해 불편을 감수하며 살아온 거잖아요.
유니버설 디자인 개념이 등장하고 점점 소수 약자들의 신체적 특성에 맞는 디자인을 사회가 제공해야 한다는 인식이 생기고 있는데요. 저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도 이러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최근 한국 디자인 학회에서도 시니어나 소수자들을 위한 디자인 논문들이 많이 발표됐고, 유니버설 디자인 섹션도 증가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Q. 디자이너, 타이포그래피 연구자, 저자, 강연자로서 활동 영역을 넓히고 계신데요. 가장 중점을 두고 있는 분야는 무엇인가요?
사실 모든 활동의 구심점은 타이포그래피 연구에 있습니다. 지식생산자(연구자)라는 기반에서 출발해 글(저자/작가)과 시각화한 그래픽 메시지(디자이너), 퍼포먼스(강연자) 등 지식 전달자 역할로 나아가려 해요. 여러 분야들과 어울리더라도 이리저리 떠다니며 표류하지 않도록 주력 분야가 있어야 합니다. 학생들에게도 한 가지 전문 분야를 구심점으로 가져야 한다는 점을 늘 강조하고 있어요.
Q. 디자이너로서 ‘글자 풍경’, ‘뉴턴의 아틀리에’ 등의 서적을 출간하면서 느낀 점이 있으시다고요.
저는 디자인을 기반으로 인문학이나 다른 학문과 융합된 콘텐츠로 책 쓰는 것을 시도했어요. 그래서 독자들이 새로운 시각으로 디자인을 접하게 된 것 같습니다. 특히 타이포그래피 같은 경우는 대중들이 잘 모르는 개념이었지만, 책을 통해 더 많이 알려졌다고 생각해요. 덕분에 오만 부의 저자가 됐어요. 감사한 일이죠(웃음).
하나의 책을 완성하는 데는 3년에서 5년 정도가 걸려요. 편집자께서 그 점을 이해해 주셔서 다행이지만, 그 기간 동안의 보상은 사실 충분하지 않거든요. 결국, 책을 쓰는 일은 리스크를 감수하고 몇 년 동안 몰두해야 하는 작업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책을 집필하는 동안 내가 참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고령자를 위한 타이포그래피’라는 저의 글이 고등학교 『독서와 작문』 교과서(비상교육)에 실려 내년인 2025년부터 고등학생들을 만날 예정이에요. 이제 타이포그래피는 ‘그거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들어본 말이잖아’라고 할 정도의 국민 교양이 되겠죠? 반은 농담처럼 꿈꾸던 일이 현실이 되어 무척 기쁩니다(웃음).
◇앞으로의 이야기
Q. 타이포그래피와 디자인의 미래는 어떨까요?
먼저 디자인과 타이포그래피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역사적 관점으로 그 흐름을 살펴봐야 돼요. 디자인은 항상 기술 발전에 대해 ‘아름다움’으로 응답해왔거든요. 그래서 AI 시대에도 디자인이 기술을 선도하기보다는, 아름다움으로 응답하는 사명은 계속 지닌 채 빠르게 대응하면서 발맞추어 나가지 않을까 예상돼요. 기술이 사람들한테 공포감을 일으키잖아요. 디자인은 그 공포감을 아름답게 완화시킬 수 있는 강한 힘을 가지고 있어요. 앞으로도 계속 기술 발전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전달하는 역할을 계속하지 않을까요?. 그게 어떤 형태일지는 모르겠지만요.
얼마 전 국제고등학교에서 문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했는데요. 똑똑한 아이들이다 보니 AI 시대의 문과가 걸어갈 길에 대한 고민이 깊어 보였어요. 저는 일단 주사위는 던져졌고, 이과의 지식을 교양으로 습득해야 하는 현실을 밀어내지 않되 문과의 고유성을 찾아야 된다는 얘기를 해줬어요. 기술이 질주하는 건 막을 수가 없고 이과는 그 일이 잘 구현되도록 역할을 하고 있어요. 문과는 그 구현되고 있는 현상에 대한 해석과 옳은 방향을 제시해야 합니다. 아마 디자인은 그런 흐름 안에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생명체 혹은 생물들이 편안한 방향으로 소통하고 있는가를 끊임없이 점검하는 일을 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어요.
Q. 멀티플레이어로서 다양한 형태의 전문가로 활동하고 계신데 또 다른 창작 활동을 그리고 계신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글문화연구소’라는 이름답게 연구 기반 작업에 중심을 두고 싶습니다. 특히 기업이나 공공기관의 연구 용역을 많이 받아, 다양한 연구를 수행하는 것이 목표거든요. 여성, 어린이, 고령자, 저시력자 등 소수자를 포함하는 다양한 몸에 맞는 글자를 연구하고 싶어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예쁜 글자와는 다르게, 특별한 방식으로 설계하고 단순히 연구에서 끝나지 않도록 디자인 작업도 진행할 생각이에요. 연구가 중심에 있고, 디자인과 집필과 강연 등의 활동이 위성처럼 돌아가는 구조로 만들고 싶습니다. 특히 나사(NASA)와 함께 재밌는 프로젝트를 진행해 보고 싶어요. 연락 주세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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