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완아, 늘 그래왔듯이 내가, 그리고 나와 함께 하는 활동가들이 (너가 바라는대로) 되게 할게. 너는 아무 걱정하지 마. 국적과 체류자격을 따지지 않는 하늘나라에서 편히 쉬고 있어. 우리 다음에 또 만나자.”
‘이주와 인권연구소’ 연구위원 김사강 연구위원이 8일 일터에서 사망한 강태완씨(32)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이다. 강씨는 27년 전 몽골에서 어머니를 따라 한국으로 이주한 미등록 이주아동으로 살아왔다.
12일 김 연구위원의 강씨에 대한 부고글에 따르면 김 연구위원은 2006년 중학생이던 강씨를 처음 만났다. 이 만남은 그를 이주아동을 위한 활동가의 길로 이끌었다. 김 연구위원은 “한국어가 모국어이고, 한국을 우리나라라고 배운 태완 같은 아이가 체류자격이 없어 언제라도 쫓겨날 수 있는 불안감을 안고 살았다, 이 현실을 바꾸고 싶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강씨는 29살 때 몽골로 떠나야 했다. 당시 법무부가 자진출국해 본국에 돌아가면 미등록 이주민에게 재입국 기회를 준다고 했기 때문이다. 몽골로 떠나기 전 15년 이상 체류한 미등록 이주아동도 체류자격을 주는 제도가 시행됐지만, 강씨는 몽골에서 태어나 이 혜택을 받지 못했다. 30살이 되던 해 강씨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우여곡절 끝에 강씨처럼 국내에서 태어나지 못한 이주아동도 체류자격을 받게 됐다. 강씨는 한국에 온 지 25년 만에 외국인등록증을 손에 쥐었다.
김 연구위원은 강씨를 자신의 자랑으로 여겼다. 강씨의 삶은 이주아동이 어떻게 살 수 있는지 하루하루 희망이었다. 강씨는 대학을 졸업했고 올 3월 전북 김제이 있는 전기 특장차업체 연구위원이 됐다. 김 연구위원은 “법무부 구제대책 연장을 촉구하는 캠페인을 위해 태완과 인터뷰 영상을 만들고 약속했던 한우를 먹으러 갔다”며 “박람회 준비를 하면서 ‘어떻게 하면 말을 잘 할 수 있느냐’고 내게 물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이제 김 연구위원은 강씨와 더 이상 마주앉아 고민을 듣고 답하지 못한다. 8일 김 연구위원이 이주노동자 안전에 관한 학회에서 발표를 하기 위해 기차를 탄 날 ‘태완이 많이 다쳐서 구급차에 실려 병원에 가고 있다’는 전화를 받았다. 학회장을 들어가려고 했을 때 강씨가 결국 사망했다는 문자를 받았다. 김 연구위원은 “태완의 성장을 보았고 태완과 같은 이주아동들이 한국에서 꿈을 키워나가도록 18년 동안 활동했다”며 “강태완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주민등록증을 만들어주려고 했다, 이제 무엇을 위해 활동해야 하나”라고 반문했다.
김 연구위원은 다시 강씨로부터 자신을 찾으려고 한다. 그는 유가족, 동료들과 강씨가 당한 사고 진상을 밝히기 위한 활동에 나설 계획이다. 그는 “다시는 이런 억울한 죽음이 일어나지 않도록 끝까지 싸우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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