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이달 20일 경기도 법인카드 등 예산을 사적으로 유용한 혐의로 검찰이 자신을 불구속 기소하자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 브라질 대통령 얘기를 불쑥 꺼냈다. 그는 “일선 부서에서 사용한 법인카드나 예산집행을 도지사가 알았을 것이고, 그러니 기소한다는 게 검찰의 입장”이라며 “증거가 없는 것은 은닉했기 때문일 것이라는, 룰라에게 적용했던 브라질 검찰의 입장”이라고 주장했다.
이 대표의 룰라 언급은 그에 대한 공직선거법 1심 유죄판결이 최종 확정될 경우 당연히 ‘이재명의 퇴장’으로 귀결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섬뜩한 경고일 수 있다. 룰라 대통령은 2003~2010년 두 차례의 대통령 임기를 마친 뒤 2016년에 재임 시절 부패 의혹으로 구속돼 1심에서 9년 6개월, 2심에서 12년 1개월의 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2019년 11월 연방대법원에서 파기환송이 결정된 데 이어 2021년에 1·2심 선고가 무효화돼 다시 대통령으로 당선돼 복귀했다.
일각에서는 이 대표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비슷한 길을 걷게 될 수도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푸틴은 두 차례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2008~2012년 최측근 드미트리 메드베데프에게 대통령직을 한 차례 맡겼다가 지금은 종신 대통령이나 다름없는 권세를 누리고 있다. 더 흔하게는 이 대표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과 정치적 경로가 꼭 닮았다는 말이 떠돈다. 네 건의 형사사건으로 91가지 혐의를 받는 트럼프 당선인은 사업 장부 위조 관련 중범죄 혐의 34건에 대한 유죄 평결을 받고도 이달 초 미국 대선에서 승리해 내년 1월 다시 백악관의 주인이 된다.
이 대표 개인의 사법 리스크가 한국 정치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그는 5개 재판, 8개 사건에서 12개의 혐의를 받고 있다. 이 대표가 2027년 대선 전에 대법원에서 한 건이라도 피선거권 박탈 수준의 유죄 확정판결을 받으면 정치생명이 다할 것으로 보는 것이 상식인데 그걸로 끝이 아닐 것이라는 억측이 끊이지 않는다. 진보 유튜버 김어준 씨는 “대선이 대법보다 빠르면 이재명은 대통령이 되고 대법이 대선보다 빠르면 이재명이 손드는 사람이 다음이 된다”며 ‘후계자 낙점설’까지 거론했다.
그러나 이재명은 룰라가 아니다. 한국 정치는 브라질처럼 특정인의 사법 리스크에 흔들릴 만큼 뿌리가 허약하지 않고 북한과 미국·중국·러시아·일본 등 4대 강국의 틈바구니에 놓인 안보 상황에서 그럴 여유도 없다. 앞으로 윤석열 대통령과 여당이 중심을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된다. 브라질의 룰라, 러시아의 푸틴, 미국의 트럼프는 대안 정치 세력이 유능했다면 대권을 거머쥐지 못했을 것이다. 보수가 사법 리스크에 갇힌 이 대표를 능가하는 유능함으로 국민의 신뢰를 얻는다면 한국은 룰라·푸틴·트럼프와 같은 ‘정치 리스크’를 피할 수 있다.
특히 윤 대통령은 여당 내 반대 세력은 물론 야당까지 품는 통합의 리더십을 보여야 한다. 그러려면 조 바이든 미 대통령로부터 선물 받아 집무실 책상에 놓은 명패에 적힌 문구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the BUCK STOPS here)’의 참뜻을 곱씹을 필요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위대한 미국 건설에 크게 기여한 해리 트루먼 전 미 대통령이 백악관 집무실에 놓았다는 이유로 유명해진 이 명패의 ‘buck(사슴)’은 포커 게임의 딜러 앞에 놓는 ‘buckhorn knife(사슴뿔 칼)’의 축약어로 시스템의 공정한 운용을 뜻한다. 윤 대통령은 모든 것을 혼자 판단해 처리하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딜러 미스나 부정행위에 대해서는 가혹한 대가를 치르겠다는 자세로 반대 세력까지 아우르며 공정하게 국정을 운영해야 한다.
집권 여당은 브라질이나 러시아처럼 정치가 퇴행하지 않도록 경각심을 갖고 혁신에 나서야 할 때다.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는 여당 내분의 불씨가 되고 있는 ‘당게(당원 게시판) 논란’을 속히 매듭짓고 ‘이재명 대항마’임을 능력으로 입증해야 한다. 최근 위증교사 혐의 1심에서 무죄 선고를 받은 이 대표는 “정치가 이렇게 서로 죽이고 밟는 것이 아니라 서로 공존하고 함께 가는 정치가 되면 좋겠다”며 자신에 대한 검찰 수사가 ‘정적 죽이기’임을 재차 강변했다. 앞으로 또 얼마나 ‘이재명 사법 리스크’의 그늘이 길어질지 알 수 없다. 너무 깊은 한국 정치 혼돈에서 벗어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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