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실리콘밸리 한인 벤처캐피털(VC) 파트너에게서 흥미로운 투자 사례를 들었다. 투자 대상 회사가 자리한 곳은 실리콘밸리가 아닌 호주 시드니, 창업자는 영국 런던에서 대학을 졸업한 한국계 사용자경험(UX) 디자이너다. 회사를 알고 투자에 이르게 된 과정이 흥미로웠다. VC 측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스레드에서 회사를 처음 접했고 투자를 마무리한 지금까지 창업자를 만난 적이 없다고 한다. 스토리보드를 손쉽게 만들 수 있도록 한 이 회사의 서비스 대상 지역은 190여 개국으로 사실상 글로벌 전역에 걸친다. 미국에서 태어나지도, 창업하지도, 채용하지도 않았으나 가장 실리콘밸리적인 성장 과정과 서비스로 VC의 눈길을 사로잡았고 결국 투자까지 받아낸 경우다.
본격적인 서비스 출시를 앞둔 또 다른 실리콘밸리 스타트업의 사례도 주목할 만하다. 근무 인력은 한국인 창업자와 투자자, 20대 초반 백인 여성 디자이너로 단출하다. 뉴욕에 사는 디자이너는 링크드인을 통해 채용했다. 창업자와 디자이너는 아직 만난 적도 없다고 한다. 업무는 원격으로, 회의는 줌으로만 이뤄진다. ‘한국인 아저씨’인 창업자는 회의 때마다 디자이너에게 “감각이 낡았다”며 혼나기 바쁘지만 젊은 뉴요커의 트렌디한 센스에 감탄만 나온다고 한다. 이 회사는 한국부터 서비스를 선보이지만 목표는 글로벌 시장이다. 나이도, 인종도, 물리적 거리의 장벽도 무력화한 전형적인 실리콘밸리 스타트업이다.
대기업을 그만두고 창업에 뛰어든 지인이 “장강의 앞 물이 된 것 같다”며 들려준 한 스타트업의 얘기도 흥미롭다. 사업상 만난 디자인 에이전시가 동남아 화장품 광고를 수주해 중국 촬영팀과 유럽 디자이너의 협업으로 결과물을 내놓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이 회사의 대표는 한국인 20대 여성. 회사는 한국에 있으나 사업 영역은 전 세계를 아우른다. 실리콘밸리 스타트업도, 테크 기업도 아니지만 글로벌 각지의 창의성을 한데 모아 결과물을 내놓는 사고의 유연성은 어떤 기업보다 실리콘밸리적이다.
과거 실리콘밸리는 샌프란시스코 인근 테크 기업과 VC·대학이 모여 기술 혁신을 이끄는 ‘물리적 공간’을 의미했다. 물론 빅테크에서 일하는 대규모 인력, 전설적인 투자 성공 사례를 써왔던 VC, 스탠퍼드대로 대표되는 고급 인력 교육은 실리콘밸리가 세계 기술 혁신의 메카로 위상을 굳건히 하는 원동력이다.
이제 혁신의 에너지는 스타트업으로 흘러가면서 물리적 공간이 아닌 혁신을 향한 정신과 태도로 정의되고 있다. 기술 발전이 이뤄낸 세계화 덕분에 실리콘밸리는 물리적 한계를 이미 뛰어넘었다. 코로나19 팬데믹 종료 이후 완전 재택근무가 줄어들고 있지만 조직 구성과 업무가 지역에 관계없이 유연하게 이뤄지는 일은 스타트업은 물론 빅테크에서도 ‘표준’으로 자리를 잡았다. 세계 각지에 퍼져 있는 인재를 실리콘밸리나 뉴욕처럼 높은 주거비를 부담하면서까지 오프라인으로 모셔오기보다는 원격 업무를 활용하는 방식으로 현실적인 해법을 모색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당선인이 재선에 성공하며 미국으로의 이직·창업은 더욱 힘들어질 전망이다. 벌써부터 비자 걱정에 고심하는 한인 창업가와 엔지니어들이 많다. 하지만 실리콘밸리 스타트업이라고 해서 굳이 현지 진출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 사무실과 법인 등기는 미국에 있으나 서비스는 국내용인 ‘무늬만 실리콘밸리 스타트업’보다는 실리콘밸리에 사무실이 없더라도, 실리콘밸리 인력을 채용하지 않더라도, 테크 기업이 아니더라도 사업의 정신과 방식에 혁신이 녹아 있다면 단연코 ‘실리콘밸리적인 스타트업’이라 할 수 있다. 그런 기업은 세계 어디에 있더라도 주머니 속 송곳처럼 뾰족하게 튀어나와 실리콘밸리가 먼저 찾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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