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반도체 핵심 인력을 중국 기업 ‘청두가오전(CHJS)’에 대거 이직시켜 삼성의 핵심 반도체 기술을 빼돌리는 데 관여한 헤드헌팅 업체 대표 등 3명이 구속 상태로 검찰에 넘겨졌다. 다만 현행법상 기술 인력 유출을 처벌할 마땅한 근거가 없어 이들에게는 무등록 상태로 인력 알선을 한 혐의만 적용됐다. 국가의 경쟁력을 좌우할 기술 인력 유출을 막기 위해서는 관련 법이 조속히 개정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서울경찰청 산업기술안보수사대는 직업안정법 위반 혐의를 받는 삼성전자 엔지니어 출신의 컨설팅 업체 대표 A(64) 씨를 검찰에 구속 송치했다고 3일 밝혔다.
A 씨는 2018년께 국내에 무허가 헤드헌팅 업체를 차리고 삼성전자 핵심 연구원들에게 기존 연봉의 최소 2~3배를 약속하며 본인이 설립 초기 단계부터 고문으로 활동해 온 청두가오전으로 이직시킨 혐의를 받는다. A 씨는 연구원들이 중국에서 받게 될 연봉의 20~30%를 돌려받는 것을 조건으로 이직을 알선해 상당한 대가를 챙긴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은 A 씨 외에도 같은 방식으로 청두가오전에 국내 반도체 전문인력을 빼돌린 헤드헌팅 업체 대표 2명과 헤드헌팅 법인 1곳도 불구속 송치했다. 이들이 청두가오전에 유출한 인력은 최소 30명으로 전해졌다.
청두가오전은 삼성전자·SK하이닉스 임원 출신 최진석(66·구속) 씨가 중국 정부와 합작해 설립한 반도체 기업이다. 청두가오전은 헤드헌터들을 통해 한국에서 빼온 인력들의 반도체 지식·기술로 중국 현지에 D램 제조 공장을 설립, 준공 1년 3개월 만인 2022년 4월 웨이퍼 생산에 성공했다. 시범 웨이퍼 생산에 통상 4~5년이 걸린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례적이다. 삼성전자는 기술 유출로 공정 개발 비용 4조 3000억 원 이상의 피해를 본 것으로 추산된다.
기술 유출 범죄와 관련된 알선 업자에게 ‘직업안정법’을 적용해 수사 단계에서 구속한 건 이번이 첫 사례다. 경찰은 그만큼 A 씨의 범행으로 인한 피해 규모가 막대하다고 보고 있다. 다만 경찰은 A 씨에 대해 고용노동부 장관 등록 없이 국외 유료직업소개업을 한 혐의(직업안정법 위반)를 적용하는 데 그쳤다. 현행법상 인력 유출을 통한 기술 유출에는 산업기술보호법을 적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산업기술보호법은 국가핵심기술 유출 시 3년 이상의 유기징역과 15억 원 이하의 벌금을 병과하지만 직업안정법은 위반 시 5년 이하의 징역 혹은 5000만 원의 벌금에 처하는 데 그쳐 처벌 수위에 큰 차이가 있다.
‘산업스파이’들은 규제가 부족한 틈을 타 더욱 활개치고 있다. 경찰청 국가수사본부에 따르면 올해 해외 기술 유출 사범 검거 건수는 25건에 달해 국수본 출범 이후 가장 많은 수준에 해당한다. 이 중 가장 엄히 처벌되는 국가핵심기술의 해외 유출 사건 역시 10건을 기록, 역대 최고치를 갈아치웠다. 국가핵심기술은 국내외 시장에서 차지하는 기술적·경제적 가치가 높아 해외로 유출될 경우 국가 안전보장과 경제 발전에 중대한 악영향을 줄 우려가 있는 산업기술로 ‘산업기술의 유출방지 및 보호에 관한 법률’에 의거해 지정된 기술을 의미한다. 이번에 유출된 삼성전자 D램 기술 역시 국가핵심기술로 분류된다.
경찰은 잇따르는 기술 유출을 막기 위해서는 국회에 발의된 산업기술보호법 개정안이 하루빨리 통과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국가핵심기술 탈취를 위한 소개·유인·알선에 관한 처벌 규정을 포함한 이 개정안은 현재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소위원회를 겨우 통과한 상황으로 아직 법제사법위원회 법안 심사 등 여러 관문을 남겨두고 있다.
경찰은 “기술 유출과 달리 ‘인력 유출’ 방식으로의 기술 유출은 통제가 어렵고 규제 회피가 용이하다”며 “엄정한 법 개정을 통해 사회적 경종을 올릴 필요성이 있다”고 강조했다.
한편 경찰은 A 씨 송치를 끝으로 청두가오전 사건 관계자 총 21명을 검찰에 넘기며 관련 수사를 마무리 짓게 됐다. 청두가오전 대표인 최 씨와 개발실장 오 모 씨는 올 9월 구속 송치됐다. 이들에게는 산업기술보호법과 부정경쟁방지법 등이 적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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